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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철천리 마애칠불상과 석조여래입상 여행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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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철천리 마애칠불상과 석조여래입상 소개

나주 철천리 마애칠불상과 석조여래입상
활기찬 깨끗한 전통적인

* 철천리의 두 개의 보물 석상, 철천리 마애칠불상과 철천리 석조여래입상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에 있는 철천리는 뒤로는 봉황의 명산인 덕룡산이 있으며, 마을 앞에 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자연마을로는 철야, 수각, 유촌, 선동마을 등이 있다. 이 마을에는 각각 보물 제461호와 보물 제462호로 지정된 마애칠불상과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나주 철천리 마애칠불상 *석조여래입상(보물 제462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4각에 가까운 원추형(圓錐形) 바위가 있다. 여기 바위 전면에 불상을 조각하였다. 바위 정상에는 동자상(童子像)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없다. 동면에는 좌상(坐像) 1구가 있고 북면에도 좌상 1구가 있는데 합장(合掌)하고 있다. 남면에는 4구의 입불이 있는데 모두 수법이 비슷하다. 또 서면에는 원래 2구의 불상이 새겨져 있었다고 전하지만 일제강점기에 광부(鑛夫)들이 떼어냈다고 전한다. 이들 불상들은 모두 소발(素髮)의 머리에 육계가 명확하며 얼굴의 세부(細部)는 뚜렷하지는 않으나 윤곽이 분명하고 우아한 편이다. 그러나 체구는 빈약하고 굴곡도 표현되지 않았으며 신체의 구분, 옷 무늬 등 선 처리에 있어서도 너무 도식적이다. 좌상과 입상이 모두 비슷한 크기이며 발아래에는 1단의 돌출부를 마련하여 자연대좌를 이루고 있다. 지금은 7불이지만 없어진 서면 불상까지 합하면 9불이 된다. 원추형 비슷한 4면석에 다수의 불상이 비스듬하게 조각된 예는 극히 드물며 또한 이렇게 4면 불을 조성한 예 역시 우리나라의 귀중한 불상의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이 불상은 일부에서 전형적 양식의 퇴화가 엿보이며 기법의 둔화, 의문(衣紋)의 도식적(圖式的) 처리 등으로 보아 12∼13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미륵사는 백제 성왕22년(544) 연기조사가 구례 화엄사와 함께 창건하였는데 임진왜란때 소실된 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되었다고 전해오며 당초의 절 이름은 창룡사였다고 한다. 옛날에는 불상의 동자상을 돌려서 잘 돌아가면(또는, 돌가루를 먹으면) 아들을 낳는 다는 속설이 있어 여인들이 치성을 드렸다고 전한다. 1999년 용화전(29.4평)을 새로 지었다.* 나주 철천리 석조여래입상 *이 불상은 5.38m나 되는 거불(巨佛)로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과 동일석으로 조각되었다. 소발(素髮)의 머리에 육계가 큼직하고 얼굴은 사각형에 가까우며 둥글고 도톰 하다. 눈은 길고 코는 크며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보이나 생동하는 불상의 미소는 보이지 않는다. 또 귀는 긴 편은 아니며 삼도가 표현되었으나 형식적이다. 신체는 괴량감이 충만하고 당당하나 어깨는 부자연스러우며 굴곡도 잘 나타나지 않았다. 수인은 시무외인, 여원인인데 어색하다. 발목 이하는 땅에 묻혀서 알 수 없는데 원래는 이중대좌였다고 전한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이며 의문(衣紋)은 원호(圓弧)를 그리면서 발목까지 내려오는데 V자식 의습이다. 광배(光背)는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이며 2조의 신광과 두광으로 구별되고 있다. 두광 안에는 머리 주위를 연화문으로 돌리고 그 사이에는 화문을 장식하였고 신광 사이에는 구름무늬(雲紋)을 새겼다. 이 석불은 얼굴의 비만감 또는, 괴체화(塊體化) 되어가는 신체적 조형 및 형식적인 의문 등이 보이나 상호에서 보여주는 강한 인상 촘촘하게 주름진 활달한 의습 아직도 전대에서만 볼 수 있는 당당한 어깨 등은 당대의 저력과 힘을 충분히 살려준 작품으로 고려시대 초기부터 유행하던 거불 양식임을 알 수 있게 한다.조성연대는 10세기 후반경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현재 철천리 마을의 나지막한 산정에 위치하고 있는데 근처에 미륵사란 조그마한 암자에서 이 불상을 모시고 있다. 옆에는 보물 제461호인 칠불석상이있다. 이곳 봉황면 지역은 백제때는 실어산현(實於山縣) 통일신라 이후 조선초까지 철야현(鐵冶縣)이 있었던 지역이다. 치소는 바로 이웃한 철야마을이다.[문화재 정보]* 철천리칠불석상지정종목  : 보물  지정번호  : 보물 제461호  지정연도  : 1968년 6월 10일  시대  : 고려  종류  : 불상  크기  : 높이 95cm* 철천리석불입상지정종목  : 보물  지정번호  : 보물 제462호  지정연도  : 1968년 6월 10일  시대 :  고려  종류  : 불상  크기  : 높이 5.38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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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철천리 마애칠불상과 석조여래입상 특징

이곳은 30대, 20대 방문이 많고 방문객들은 주로 2017국제농업박람회, 무안 가볼만한곳에 관해 관심이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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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대용생가및묘소

문평면 오룡리 오륜마을 깊숙이 나대용장군의 생가가 초가로 복원되어 있다. 그 초가에서 대대로 후손들이 살다가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새로 단장했다. 나대용 장군은 임진왜란때 이 충무공 막하에서 거북선 건조에 전력을 기울인 실질적인 공로자로 평가되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인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인 이순신 장군을 훈련원주부의 신분으로 찾아가 그 제작을 협의하니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았고 그 후 임난이 일어나자 거북선 3척을 처음으로 진수했다 한다. 나대용장군은 충무공과 함께 사천승첩을 비롯하여 당포전, 당항포전, 견내량전, 안골포전, 노량대첩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쾌속정인 해추선을 발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충무전서> <난중일기>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뒷받침해 주고 있다. 묘소는 생가에서 약 2km 떨어진 마전산에 있으며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어 시험했다는 방죽이 마을 앞에 있는데, 지금은 논으로 경작되고 있고 마을 이름도 방죽골이다. 나대용장군은 조선시대 최고의 조선 기술자였다. 이순신장군과 함께 임진왜란 최고의 걸작인 거북선을 만들었고, 이후에도 임진년과 같은 국난에 대비하기 위해 창선, 해추선 등을 만들어 내는 과학자였다. 체암 나대용장군 기념사업회가 1975년 건립한 소충사에서는 장군의 과학적인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22일 '과학의날'에 제사를 모신다. * 양식 - 목조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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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반남 고분군

* 삼국시대, 마한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문화재, 대안리 고분군 *대안리의 동쪽에 위치한 자미산(紫薇山)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낮은 구릉에 분포되어 있는 12기의 삼국시대(三國時代) 고분이다. 1917~1918년과 1938~1939년 동안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조사된 이래 현재까지 독무덤 ·돌방무덤[石室墳] 등 12기의 고분이 발굴되거나 그 존재가 확인되었다. 4·8·9호는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5·6·10·11·12호는 인멸되었다. 4호분은 1978년에 도로공사 과정에서 노출되어 전남대에 재직 중이던 최몽룡교수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7세기대의 백제(百濟) 석실분(石室墳)으로 밝혀졌고 석실은 전남대학교에 이전 복원되었다. 3호분과 9호분은 1918년 일본인 야쓰이(谷井濟一)에 의해 조사되었는데 8호분에서는 4기의 옹관(甕棺)과 단지·뚜껑·대접·유리옥 등이 출토되었다. 9호분은 대안리 고분군 중 최대 규모이며 9기의 옹관과 함께 금반지·큰칼·구리팔찌·유리구슬·토기 등 유물이 출토되었다. 대안리고분군의 분구 형태는 원형·방대형·사다리꼴 등이고, 규모는 길이 11m 내외(2호분)에서 47m 내외(9호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 마한 토착세력의 무덤으로 추정 *지금까지 1·2·3·4·7·8·9호분이 정비복원되었는데, 최근에 복원된 1·2·3호분에서는 분구 주변에서 모두 도랑이 확인됨에 따라 대안리고분군을 비롯한 반남고분군(潘南古墳群)의 다른 고분들도 대부분 도랑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분구 주변의 도랑은 묘역구분·배수·채토 등 다양한 용도에서 만들어졌다. 내부 매장시설은 4호분과 같이 석실인 경우도 있지만, 나머지 고분들은 여러 개의 옹관으로 구성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목관(木棺)이 섞여 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된다. 대안리 고분군에는 4호분과 같이 7세기대의 백제 석실분이 섞여 있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고분들은 백제의 영산강유역 진출 이전에 자리잡고 있던 마한(馬韓) 토착 세력자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중심연대는 반남고분군 가운데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4세기말 ~ 5세기초로 판단된다.  * 유물상으로 주목되는 4호분과 9호분 *12기의 고분 중 매장 주체부의 구조나 유물상에서 주목되는 것은 4호분과 9호분이다. 4호분은 파괴된 돌방무덤으로 부여 지역에서 보이는 백제 말기 형식인 판축조평천장식으로 되어 있다. 수습된 껴묻거리에 회색 연질의 긴목병, 적갈색 바리모양토기, 은장도자루, 관고리 및 널못 등이 있는데 이 중 긴목병은 출토예가 많지 않은 희귀한 것이다. 9호분은 그 규모가 동서 44.3m, 남북 34.94m, 높이 8.41~7.35m에 이르는 대형 방대형고분이다. 분구 정상의 평탄면에 9기의 독이 매장되어 있어서 12기의 독이 매장된 신촌리 9호분과 아울러 반남면 고분군 중 최대 고분에 속한다. 또, 분구의 규모가 장대할 뿐만 아니라, 껴묻거리가 많고 다양한 점도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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