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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회사 여행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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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회사 소개

불회사
경치가좋은 소박한 활기찬

* 화려함보다는 호젓함으로 사람을 사로잡는, 불회사 *불회사는 백양사의 말사로, 운흥사터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덕룡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동진 태화 원년 (366년)에 인도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창건되었고 희연조사 2창, 조선 태종 2년(1402) 원진국사가 3창하고, 정조 22년(1789) 큰 화재로 건물이 대부분 불타버린 것을 1800년 중건하였다.  불회사는 단번에 눈에 들어오는 화려함은 없지만, 호젓한 분위기로 사람을 붙잡는다. 대웅전(국가 보물 1310호)과 명부전, 삼성각, 나한전, 요사채가 동백숲을 뒤에 두르고 가지런히 자리잡고 있다.  특히 대웅전에 안치된 삼존불 중 비로자나불은 종이로 만든 지불로 유명하다. 계곡은 깊지 않아 산의 참맛은 덜 하나 절 주위의 전나무, 삼나무, 비나무 등의 숲은 아늑한 분위기를 이룬다. 단풍이 가장 늦게 드는 지역으로 그 빛깔이 인근에서 가장 아름답다. 절 입구에는 부정을 금하고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문신상인 석장승 한쌍 (중요민속자료 제 11호)이 서 있다. 할아버지 장승은 툭 튀어 나온 퉁방울눈을 하고, 이맛살을 굵게 찌푸려 남도 특유의 해학적 표정을 짓고 있다. 할머니 장승은 절을 찾는 사람들을 반기는 듯 웃음을 머금은 표정이 다정다감한 할머니의 표정 그대로이다. 할아버지 장승의 키는 2.3미터, 할머니 장승은 1.7미터이다.  * 연중 수련회 개최 (관음 대참회 수련회) * 규모 -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지붕(1동)  * 불회사 창건시기에 대한 두 가지 설화 *불회사의 창건 시기에 관해서는 두 가지 기록이 전하는데, 하나는 384년(침류왕 1)에 인도승 마라난타가 창건하고 681년(신문왕 1)에 왕명으로 중창되었다고도 하는 것이고, 또다른 하나는 367년(근초고왕 22)에 희연이 창건하고 713년에 연기가 중창했다는 설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절의 이름이 불호사로 기록되어 있어 창건 때는 불호사였다가 1808년경에 불회사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절의 중창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원진국사는 한때 자신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는 호랑이의 도움으로 경상도 안동 땅에서 시주를 얻어 대웅전을 중건하게 되었다. 공사가 이루어지자 원진은 좋은 날을 택하여 상량식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일의 추진이 늦어져 어느새 해가 저물고 말았다. 이에 원진은 산꼭대기에 올라가 기도를 하여 지는 해를 붙잡아두고, 예정된 날짜에 상량식을 마쳤다는 것이다. 이때 원진이 기도하던 자리가 바로 일봉암이라고 한다.* 나주 불회사석장승 *중요민속문화재 제11호(1968년 12월 12일 지정)불회사 사찰 입구에 있는 남녀 장승, 불회사 석장승 *불회사 석장생은 사찰 입구 300m 지점 오솔길 좌우에 2기가 있다. 장승의 앞면에는 ‘당주’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당(唐)자 주(周)자 글씨는 길(道)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당자는 사당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 주자는 꼬불꼬불한 길을 뜻한다. 2기 중 우측이 남장생이고 좌측이 여장생인데 여장생은 하반신이 지면에 매몰되어 있다.남장생(하원당장)은 얼굴 조각 선이 깊고 인상적이며 입 좌우에 치아가 각 1본씩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수염을 상징한 굵은 양각 선이 턱 아래에서 좌측으로 40cm쯤 내려와 있다. 얼굴이 남자상으로 선이 뚜렷하고 머리에서 중앙을 솟아오르게 하여 옛날 상투를 뜻한 것으로 보인다. 각자는 원래 「하」인데 후세에 누구인지 장난삼아 「정」자로 판 것 같다.좌측 여장생(주장군)은 남장생에 비해 얼굴이 여성적으로 온화하며 웃는 인상이고 부드럽고 평면적이다. 장생은 마을 수호신으로서의 장생과 이정표로서의 장생, 경계를 표시하는 장생이 있는데, 세워진 장소는 주로 사찰 입구, 마을, 성문 밖, 경계 길가 등이다.* 장생과 불회사 석장승 *「장생」이란 문자가 문헌상으로 나타난 가장 오래인 것은 신라 경덕왕 18년(759년)으로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에 「이때가 건원 2년인데 특별히 교지를 내려 장생표주를 세우게 했는데 지금도 볼 수 있다.(是以乾元二年 特敎植 長生標柱 至今存焉)」이란 기록이 보인다.불회사 석장생의 제작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불회사의 인근에 있는 운흥사 석장생(하원당장군)의 조각 형태와 그 수법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운흥사 석장생이 만들어진 강희 58년(1719년)을 전후하여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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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회사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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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회사 특징

이곳은 30대, 40대 방문이 많고 방문객들은 주로 나주 불회사, 불회사대웅전에 관해 관심이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방문 연령 분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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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회사 여행 관련어

운흥사 덕룡산 전등사 통도사 석장승 나주 불회사 불회사대웅전 운주사 천은사 화엄사 선암사 화순 운주사 태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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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대용생가및묘소

문평면 오룡리 오륜마을 깊숙이 나대용장군의 생가가 초가로 복원되어 있다. 그 초가에서 대대로 후손들이 살다가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새로 단장했다. 나대용 장군은 임진왜란때 이 충무공 막하에서 거북선 건조에 전력을 기울인 실질적인 공로자로 평가되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인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인 이순신 장군을 훈련원주부의 신분으로 찾아가 그 제작을 협의하니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았고 그 후 임난이 일어나자 거북선 3척을 처음으로 진수했다 한다. 나대용장군은 충무공과 함께 사천승첩을 비롯하여 당포전, 당항포전, 견내량전, 안골포전, 노량대첩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쾌속정인 해추선을 발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충무전서> <난중일기>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뒷받침해 주고 있다. 묘소는 생가에서 약 2km 떨어진 마전산에 있으며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어 시험했다는 방죽이 마을 앞에 있는데, 지금은 논으로 경작되고 있고 마을 이름도 방죽골이다. 나대용장군은 조선시대 최고의 조선 기술자였다. 이순신장군과 함께 임진왜란 최고의 걸작인 거북선을 만들었고, 이후에도 임진년과 같은 국난에 대비하기 위해 창선, 해추선 등을 만들어 내는 과학자였다. 체암 나대용장군 기념사업회가 1975년 건립한 소충사에서는 장군의 과학적인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22일 '과학의날'에 제사를 모신다. * 양식 - 목조초가
활기찬 깨끗한 전통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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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반남 고분군

* 삼국시대, 마한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문화재, 대안리 고분군 *대안리의 동쪽에 위치한 자미산(紫薇山)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낮은 구릉에 분포되어 있는 12기의 삼국시대(三國時代) 고분이다. 1917~1918년과 1938~1939년 동안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조사된 이래 현재까지 독무덤 ·돌방무덤[石室墳] 등 12기의 고분이 발굴되거나 그 존재가 확인되었다. 4·8·9호는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5·6·10·11·12호는 인멸되었다. 4호분은 1978년에 도로공사 과정에서 노출되어 전남대에 재직 중이던 최몽룡교수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7세기대의 백제(百濟) 석실분(石室墳)으로 밝혀졌고 석실은 전남대학교에 이전 복원되었다. 3호분과 9호분은 1918년 일본인 야쓰이(谷井濟一)에 의해 조사되었는데 8호분에서는 4기의 옹관(甕棺)과 단지·뚜껑·대접·유리옥 등이 출토되었다. 9호분은 대안리 고분군 중 최대 규모이며 9기의 옹관과 함께 금반지·큰칼·구리팔찌·유리구슬·토기 등 유물이 출토되었다. 대안리고분군의 분구 형태는 원형·방대형·사다리꼴 등이고, 규모는 길이 11m 내외(2호분)에서 47m 내외(9호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 마한 토착세력의 무덤으로 추정 *지금까지 1·2·3·4·7·8·9호분이 정비복원되었는데, 최근에 복원된 1·2·3호분에서는 분구 주변에서 모두 도랑이 확인됨에 따라 대안리고분군을 비롯한 반남고분군(潘南古墳群)의 다른 고분들도 대부분 도랑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분구 주변의 도랑은 묘역구분·배수·채토 등 다양한 용도에서 만들어졌다. 내부 매장시설은 4호분과 같이 석실인 경우도 있지만, 나머지 고분들은 여러 개의 옹관으로 구성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목관(木棺)이 섞여 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된다. 대안리 고분군에는 4호분과 같이 7세기대의 백제 석실분이 섞여 있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고분들은 백제의 영산강유역 진출 이전에 자리잡고 있던 마한(馬韓) 토착 세력자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중심연대는 반남고분군 가운데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4세기말 ~ 5세기초로 판단된다.  * 유물상으로 주목되는 4호분과 9호분 *12기의 고분 중 매장 주체부의 구조나 유물상에서 주목되는 것은 4호분과 9호분이다. 4호분은 파괴된 돌방무덤으로 부여 지역에서 보이는 백제 말기 형식인 판축조평천장식으로 되어 있다. 수습된 껴묻거리에 회색 연질의 긴목병, 적갈색 바리모양토기, 은장도자루, 관고리 및 널못 등이 있는데 이 중 긴목병은 출토예가 많지 않은 희귀한 것이다. 9호분은 그 규모가 동서 44.3m, 남북 34.94m, 높이 8.41~7.35m에 이르는 대형 방대형고분이다. 분구 정상의 평탄면에 9기의 독이 매장되어 있어서 12기의 독이 매장된 신촌리 9호분과 아울러 반남면 고분군 중 최대 고분에 속한다. 또, 분구의 규모가 장대할 뿐만 아니라, 껴묻거리가 많고 다양한 점도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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