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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성암 여행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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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성암 소개

사성암
느낌있는 엄숙한 화려한

사성암[四聖庵]은 아직 덜 알려진 작은 암자로 거대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지만 멋스러움만큼은 으뜸이다.연기조사가 처음 세운 것으로 전해지는 사성암은 바위 사이에 박혀 있다. 바위를 뚫고 나온 듯한 '약사전'과 바위 위에 살짝 얹어 놓은 듯 단아한 '대웅전' 등 모든 구조물이 산과 하나되어 고운 자태를 뽐낸다.대웅전 옆으로 난 좁은 길을 돌면 아래로 섬진강이 돌아 흐르고 구례읍과 지리산 노고단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에는 도선국사가 참선했다는 '도선굴'과 암벽에 원효대사가 손톱으로 새겼다는 '마애여래입상'도 보며 일상의 번민을 씻을 수 있다사성암 올라가는 길이 제법 가파르다. 시원한 바람과 맑은 공기를 쐬며 조금은 헉헉거리며 산 정상까지 올라가면 기암절벽에 절묘하게 있는 절이 보여 저절로 감탄의 탄성이 나온다. 사성암은 백제 성왕 22년(544년)에 연기조사가 본사 화엄사를 창건하고 이듬해 사성암을 건립했다. 기록에 의하면 4명의 고승, 즉 원효대사, 의상대사, 도선국사, 진각국사가 수도한 곳이어서 사성암이라고 불리운다.또한 송광사 제6세인 원감국사 문집에는 사성암이 있는 오산(獒山) 정상에 참선을 행하기에 알맞은 바위가 있는데 이들 바위는 도선, 진각 양국사가 연좌수도 했던 곳이라고 나와 있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 이래 고려까지 고승들의 참선을 위한 수도처였다고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처음으로 눈에 들어 온 법당은 바위를 쪼아 그 돌로 축대를 쌓아 절벽에 절묘하게 세워놓았는데 그 모양이 절벽과 한 몸을 이룬 탑의 모양이다. 사바세계 위로 봉긋이 솟은 산 전체를 기단으로 삼아 정상에 석탑을 세운 모습이 자연적 예술적 가치가 높은 사찰임을 느낄 수 있다.절벽 옆으로 계단을 만들어 법당으로 올라가는 길은 신도들의 기원이 담긴 기와로 단장이 되어 있어 계단 하나하나가 발원의 계단 같다. 그 계단을 올라가 법당입구에 서서 아래를 보니 오금이 저려온다. 뒤로 물러나 법당 안을 들여다보면 다른 법당과 달리 벽에 벽화가 보인다.원효스님이 선정에 들어가 손톱으로 그렸다는 ‘마애약사여래불’이라는 벽화인데 사성암의 불가사의한 전설이. 약 25미터의 기암절벽에 음각으로 새겨졌으며 왼손에는 애민중생을 위해 찻잔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고 현재 전라남도 문화재 22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건축양식은 금강산에 있는 보덕암의 모습과 흡사하다.도선국사가 수도를 했다고 하는 도선굴은 한사람이 걸을 수 있는 통로를 걸어가 허리를 굽혀 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굴 안의 엄숙하면서도 고요함에 그리고 산꼭대기 바위와 바위사이에 오묘한 굴이 있음에 과연 정말로 "이런 곳에서 수행하면 정말 득도하지 않을 수 없겠구나" 생각이 절로 난다. 도선굴에서 나와 아래세상을 바라보니 고요히 흐르는 섬진강과 구례와 곡성평야가 한눈에 시원하게 들어온다. 산꼭대기에 있는 그곳에서 내려다 본 세상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강산뿐이다사성암은 SBS 드라마 <토지>에서 서희와 길상이가 불공을 드린 촬영장소로 널리 알려져 많은 참배 불자들과 관광객이 줄을 잇고 있다. 사성암은 굽이굽이 흐르는 섬진강 모습을 오롯이 볼 수 있으며, 물줄기 너머로 가을 들녘과 지리산 자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사성암이 위치한 오산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산 마루에 바위 하나가 있고 바위에 빈 틈이 있어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세상에 전하기를, "승려 도선(道詵)이 일찍이 이 산에 살면서 천하의 지리(地理)를 그렸다" 또한《봉성지(鳳城誌)》에 이르기를 “그 바위의 형상이 빼어나 금강산과 같으며, 옛부터 부르기를 소금강”이라 하였다. 암자 뒤편으로 돌아서면 우뚝 솟은 절벽이 전개되는데, 풍월대·망풍대·신선대 등 12비경으로 절경이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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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성암 특징

이곳은 40대, 30대 방문이 많고 방문객들은 주로 구례 여행, 구례 오산 사성암에 관해 관심이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방문 연령 분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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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관광특구

구례 관광특구는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강과 평야가 두루 펼쳐지는 토지면과 마산면, 광의면, 산동면을 포함하는 대단위 관광 지구다. 구례군 구석구석이 관광특구라 할 만큼 볼거리가 다양하다. 예부터 기름진 평야로 이름 난 구례의 가장 큰 자연 자원은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국립공원과 섬진강이다.‘어머니의 품’이라 일컬어지며 해마다 많은 등산객들이 찾는 지리산국립공원은 깊고 너른 산세와 맑은 계곡 등 때 묻지 않은 자연 경관으로 사랑 받고 있다. 등산 코스도 여러 갈래이며 곳곳에 산장이 있어서 백패킹도 가능하다.지리산 언저리를 걸어서 도는 지리산 둘레길은 지리산 등반과는 또 다른 정취를 즐기는 트레킹 코스다. 산행과 트레킹을 즐기는 동안 봄에는 산수유 군락을, 가을에는 단풍에 물든 산과 계곡을 만날 수 있다.지리산 온천 같은 레저 시설을 비롯해 한옥 민박, 게스트하우스 등 다양한 숙박 시설을 갖추고 있는 것도 장점이다. 화엄사, 연곡사, 천은사 등 유서 깊은 사찰과 역사적 유물들도 함께 자리하고 있어 역사 탐방에도 유익하다.곡성에서 하동까지 길게 이어지는 섬진강의 물줄기는 고즈넉한 풍경을 자아낸다. 섬진강은 국내 제일의 청정 하천으로 손꼽히며 다슬기와 은어가 많이 나기로 유명하다. 섬진강을 끼고 달리는 섬진강변도로 역시 최고의 전망을 선사하는 드라이브 코스다. 계절에 따라 산수유꽃축제, 섬진강변벚꽃축제, 피아골단풍축제 등 다양한 축제가 열린다.* 구례 관광특구 현황1) 범위 /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마산·광의·산동면 일부 지역2) 면적 / 78,024,000㎡ 3) 관광특구 지정일 / 1997년 1월 18일* 구례 관광특구 시설 현황지리산, 섬진강, 지리산 온천 관광지, 피아골 계곡, 산수유 시목지, 화엄사, 천은사, 연곡사, 한옥 마을 등
전통적인 한국적인 활기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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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석주관성

석주관은 전라도 경상도를 연결하는 지리산의 요새이다. 구례읍에서 섬진강을 따라 하동 쪽으로 10㎞쯤 가다 보면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에 이르는데, 좌측으로 높이 약 10m의 낭떠러지가 나오며, 여기가 석주관으로 사적 385호로 지정되어 있다.이곳은 삼한시대에 마한과 진한의 경계였으며,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의 경계로 군사상 요충지였으며, 고려 때에는 남해에서 침입한 왜구를 막기 위해 성을 쌓은 곳이기도 하다. 이곳을 튼튼히 하기만 하면 전주에서 구례, 남원을 향해 넘어오는 왜적을 방어할 수 있는 호남의 전략적 요충지로, 고려말 왜구가 횡행함에 따라 진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나, 조선이 개국하고 정국이 안정되어 감에 따라 진을 폐지하여 황폐되었는데, 1592(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라도 방어사 곽영이 성을 쌓고 구례 현감인 이원춘에게 석주관 방어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는 현재 남아있는 성곽의 잔존부를 통해 쉽게 알 수 있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는 이곳 석주관에 고려말 때처럼 만호진을 설치하여 왜구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지만, 활용되지 못하고 황폐해지고 현재에 이른다. 성벽의 전체길이는 약 750m이며, 높이 1∼1.5m, 아래폭 1.4∼1.5m 위폭 70∼90㎝ 정도로 대부분은 무너져 훼손된 상태로 근래에 들어 다시금 복원을 하고 있다. 면적 : 29,965㎡성벽 : 전체길이는 약 750m이며 높이 1∼1.5m, 아래 폭 1.4∼1.5m, 윗폭 70∼90cm 정도로서 대부분은 무너진 상태
전통적인 한국적인 활기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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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운조루 고택

이 집은 조선 영조 52년 (1776년)에 당시 삼수 부사를 지낸 류이주(柳爾胄)가 세운 것으로 99간 (현존73간)의 대규모 주택으로서 조선시대 선비의 품격을 상징하는 품자형(品字形)의 배치 형식을 보이고 있는 양반가이다. 류이주는 그가 처음 이사와 살았던 구만들(九萬坪)의 지명을 따 호를 귀만(歸晩)이라 했으며 이 집을 귀만와 (歸晩窩)라고도 불렀다. 운조루라는 택호는 <구름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과 함께 <구름위를 나르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본디 이집의 이름은 중국의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에서 따온 글이다.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 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 오네>의 문구에서 첫머리 두 글자를 취해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구례 운조루 고택은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와 함께 내수구(앞 도랑)와 외수구(섬진강)가 제대로 되어 있는 명당터에 자리잡고 있다. 집 앞의 오봉산은 신하들이 엎드려 절하는 형국이라고하며, 연당은 남쪽의 산세가 불의 형세를 하고 있어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일대는 금귀몰니(金龜沒泥), 금환락지(金環落地), 오보교취(五寶交聚), 혹은 오봉귀소(五鳳歸巢)의 명당이 있는 곳이라고 하며, 이 집터에서 거북이의 형상을한 돌이 출토되었기에 금귀몰니의 명당으로서 남한의 3대 길지로 알려져 있다. 구례 운조루 고택에는 바깥사랑채, 안사랑채, 아랫사랑채 등으로 각각 누마루가 있었으나 지금은 아쉽게도 안사랑채와 아랫사랑채의 누마루는 남아 있지 아니하다. 현재 이 집은 건평 426.45m²(129평)으로 一 자형 행랑채와 북동쪽의 사당채를 제외하고 T자형의 사랑채와 ㄷ자형의 안채, 안마당의 곡간채가 팔작지붕, 박공지붕, 모임지붕으로 연결되어 있는 일체형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 집에 있는 목독(나무로된 쌀독의 마개에 <他人能解>라는 글귀를 써두었음)은 가난한 이웃 사람이 쌀을 꺼내 끼니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음덕을 베풀고 적선을 하는 것이 돈을 가진 자의 도리임을 보여 주었던 류씨 문중의 상징물이다. 200년이 지나도록 망하지 아니하고 오늘날까지 가문이 번창한 것은 오로지 분수를 지키며 생활하고, 이웃을 돌보았던 마음이 전승되어 내려왔기 때문이라고 본다. 류이주의 5세손인 류제양(柳濟陽)은 일만여편의 시(詩)를 쓰고 손자 류형업(柳瀅業)에 이르기까지 80년간 하루도 빠지지않고 생활일기와 농가일기를 썼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록문화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위대한 선조들의 유업이라 아니할 수 없다. 구례에서 연고사, 쌍계사, 하동 방면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토지면 소재지에 내리면 이 일대가 금환락지의 들판이다. 구례 운조루 고택은 이곳 여러 마을 중 오미동에 있다. 창건주 유이주 무덤은 운조루 뒤편 베틀봉이라는 산등성이에 있고 시목나루는 구만리 들판과 섬진강 건너 문척면 회정리를 오고 가던 나루터다. 지금은 나루터의 흔적이 보이지 않고 강변에는 봉소대(鳳巢臺)라는 정자가 있다. 구례 운조루 고택과 함께 답사할 곳은 화엄사와 천은사, 장수마을 사도리, 매천사당 등이 있다.
조용한 전통적인 한국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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