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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불산 여행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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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불산 소개

억불산
전통적인 한국적인 고풍스러운

장흥읍 동남쪽에 있어 시가지를 굽어보고 있는 억불산은 높이가 518m로 비교적 낮은 편이지만 능선이 길고 부드러워 마치 고운 여인이 치맛자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걷는 것과 같은 형상이다.옛날 봉수대가 있던 정상부에는 기암괴석이 알맞게 조화를 이루고 있고 특히 탐진강과 함께 장흥을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고 있다.재미있는 전설이 담긴 며느리 바위는 어린애를 업은 여자의 형상, 아니면 스님이 합장하고 기도하는 부처 모습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실제로 가까이 가보면 그 웅장함이 하늘을 찌를듯하고 20만 평의 편백나무 숲과 대나무 숲은 삼림욕장과 산책로로 최적이어서 아침 산행을 하는 사람들과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오르는 산으로 장흥사람들의 건강을 지켜 주는 산이기도 한다. 특히, 산 중턱에 천문과학관이 개관되면서 5부 능선에 있는 천문과학관까지 4~6m폭의 임도가 잘나있고 가로등과 음향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낮이든 야간이든 누구나 부담 없이 공원에서 산책하는 기분으로 오를 수 있다.* 산행안내 *장흥군민회관앞(버스터미널앞)에서 동쪽으로 1.5km쯤 가면 상선 약수 평화마을이 나온다.평화약수터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임도를 따라 산행을 시작하는 제1코스와, 마을입구 저수지 앞에서 대나무 숲을 경유하는 제2코스, 남도대학 장흥캠퍼스 옆에서 시작하는 코스, 안양면 수양리 미곡종합처리장에서 시작하는 코스가 있는데. 대부분 제1코스를 제일 많이 이용하고 있고 여름철에는 시원한 대나무숲 바람을 받기위해 제2코스도 많이 택하고 있다.제1,2코스는 등산로를 따라 정상을 향하다보면, 2006년 7월 7일 개장한 밤하늘의 별자리등 천체를 볼수 있는 장흥천문과학관이 나오고 조금 더 오르면 보호수로 지정되어 억불산을 상징했던 큰 소나무(수령 200년)가 우뚝 서있는 곳이 나온다. 지난 2004년도 태풍때 벼락으로 인해 지금은 고사되어 있지만 이곳이 중간 지점이다. 억불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여기서 한번 정도 쉬고 정상에 오르거나 아니면 되돌아 내려가기도 한다.남도대학 옆에서 오르는 코스는 유순한 다른 코스에 비해 가파르고 험하다. 많이 이용하지 않지만 스릴을 원하는 등산객들은 가끔씩 이 길을 택한다. 시작부터 곧게 자란 삼나무 숲에서 나오는 피토치드로 정신피로를 씻기도 전에 너널지대로 이어진다. 거의 직선으로 이어지는 너널지대 계곡을 10여분 오르면 마치 앞을 가로 막고 내려 보고 있는 듯 한 거대한 며느리바위가 나타난다. 그 며느리 바위 밑으로 나 있는 너덜 길을 조금 오르면 옛날 암자 터가 나온다. 바위 부스러기가 구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여기서 조금 더 오르면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 길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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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불산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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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불산 특징

이곳은 40대, 50대 방문이 많고 방문객들은 주로 장흥억불산, 전남억불산에 관해 관심이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방문 연령 분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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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불산 여행 관련어

장흥억불산 장흥읍 사자산 억불산민박 제암산 일림산 흑석산 전남억불산 조계산 월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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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을 찾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다른 지역

국립 천관산자연휴양림

호남 5대 명산 중의 하나인 천관산은 관산읍과 대덕읍 경계에 있는 723m의 산으로 온 산이 바위로 이루어져 봉우리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으며, 봄에는 붉게 피는 동백꽃 가을에는 억새가 장관을 이룬다. 특히 정상부근에 바위들이 비죽지죽 솟아 있는데, 그 모습이 주옥으로 장식된 천자의 면류관 같다하여 천관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특히 해안과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산맥을 타고 넘는 해풍과 웅장한 천관산과의 만남은 인간의 힘으로는 빚어낼 수 없는 자연의 힘을 지니고 있다. 산에 오르면 남해안 다도해가 한 폭의 동양화처럼 펼쳐지고, 북으로는 영암의 월출산, 장흥의 제암산, 광주의 무등산이 한눈에 들어오며 날씨가 맑으면 바다쪽으로 제주도 한라산이 신비스럽게 나타난다. 능선 위로는 기암괴석이 자연 조형물의 전시장 같고, 정상 부근으로 억새밭이 5만여평 장관을 이룬다. 또한 위로 천관사가 500m 이내에 있고, 천관산의 등산로가 연계되어 있어 문화유적답사와 등산에 큰 몫을 하고 있다. 휴양림 내에 관리사, 산막, 주차장, 취사장, 임간수련장 등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으며, 7km의 산길도 잘 가꾸어져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전통적인 한국적인 고풍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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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기념탑

동학농민 혁명은 1894년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고 외세를 몰아내어 패망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건지려고 농민들이 들고일어난 혁명이다. 정치는 두루 부패하여 백성들은 지주들과 관리들의 무자비한 늑탁을 견디다 못해 수많은 사람이 고향을 등지고 먹을 것을 찾아 정처 없이 떠돌았고, 동아시아에서 식민지를 차지하려는 여러 강국들은 이리 때 처럼 우리나라를 넘보는 형평이었다. 이때, 전라도 고부 농민들이 동학도를 중심으로 전봉준 장군을 앞세우고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도탄에서 건지자, 서양 세력과 일본세력을 몰아내자는 짓발을 휘날리며 일어서자, 이 불길은 전국으로 번져 그해 12월에는 20여만 명의 대군을 헤아렸다.여기 장흥 농민들은 동학의 어산접, 용반접, 웅치접을 주축으로 이방언 장군을 앞세우고 남도에서는 가장 거세게 일어나, 특히 관군을 크게 무찌른 장성 황룡강 전투에서 눈부시게 싸웠고,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부대가 처음으로 전투에 나선 공주 우금고개 대회전에서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다. 농민군은 이 공주전투에서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루는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일본군의 신무기에는 당할 길이 없었다. 여러 번 반격을 꾀하던 농민군들은 마지막으로 이듬해 1월 5일 저 석대들에서 이곳 농민군을 중심으로 3만여 명의 일본군과 회심의 일전을 벌였으니, 이것이 동학농민 혁명 최후의 불꽃이었다.
전통적인 한국적인 고풍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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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사

가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보림사는 지금부터 1천 3백여 년(759년) 전에 창건한 신라시대의 거찰이다. 이곳에 처음절을 지은 것은 보조국사보다 100년 전쯤 사람인 원표대덕(元表大德)으로 원래의 이름은 가지산사였다. 그 뒤 보조국사 체징이 이곳에서 헌안왕의 뜻을 받아 신라 구산선문 중 최초로 가지산파를 열었다. 880년 체징이 입적할 때에 무려 800여 명의 제자들이 여기에 머물렀다고 한다. 보조국사가 입적 후에 헌강왕이 절이름을 내려주어 보림사가 되었다. 화엄종 사찰로 출발해 선종사찰로 바뀐 것이다. 미국하버드대학 연경도서관에 있는 "신라국 무주 가지산 보림사 사적기"는 조선초 세조 3년(1457)에서 10년(1464)사이에 발간된 것으로 보림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여기에는 창건설화가 이렇게 적혀있다.* 보림사 창건설화『신라의 명승 원표대덕이 인도 보림사, 중국 보림사를 거쳐 참선중 한반도에 서기가 어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신라로 돌아와 전국의 산세를 살피며 절 지을 곳을 찾았다. 어느날 유치면 가지산에서 참선을 하고 있는데 선녀가 나타나더니 자기가 살고 있는 못에 용 아홉마리가 판을 치고 있으므로 살기 힘들다고 호소해왔다. 원표대덕이 부적을 못에 던졌더니 다른 용은 다 나가고 유독 백룡만이 끈질기게 버텼다. 원표대덕이 더욱 열심히 주문을 외었더니 마침내 백룡도 못에서 나와 남쪽으로 가다가 꼬리를 쳐서 산기슭을 잘라놓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 때 용꼬리에 맞아 파인 자리가 용소(용문소)가 되었으며 원래의 못자리를 메워 절을 지었다. 보림사 주위에는 용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청룡리, 청룡이 피를 흘리며 넘어간 피재, 용두산, 용문리, 용소, 녹룡리등인데 창건설화에서 토속신앙과 불교의 대립이 있었음을 유추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의 가지산 보림사는 인도의 가지산 보림사, 중국의 가지산 보림사와 더불어 세계 3보림의 하나라고 한다. 보림사는 통일신라 구산선문 가운데 가지산문의 종찰로서 고려말까지 선맥이 이어져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도 가지산문에 속했다. 고려시대는 원응국사와 공민왕의 왕사인 태고 보우국사가 주석하여 선종을 진작시킨 큰 절이었고, 그후 여러차례 중창과 중수를 거치며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던 보림사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외호문과 사천왕문을 빼고 20여 여 동의 건물이 모두 불타버렸다. 1950년 가을 전남 지역의 공산군 유격대가 보림사에서 한 겨울을 났는데 다음해 봄 군경토벌대는 '공비들의 본거지'라고 보림사에 불을 질러버렸다고 한다. 전쟁 이후 조금씩 복원되어 현재는 건물로 외호문과 사천왕문, 1998년에 복원된 대적광전, 대웅전, 새로 지은 방각과 요사조사전, 삼성 각, 명부전, 주지실, 암자 등이 절터를 채우고 있으며, 담장도 말끔히 둘렀다. 보림사에서 처음보게 되는 일주문은 화려하고 장중한 모습이 사람의 눈길을 잡는다. 사천왕문은 정면3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이며, 보물 제1254인 사천왕상은 중종34년(1539년)에 처음 조성되어 정조 때(1780년)중수된 것으로 우리나라 목각 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크며 오래된 것이다.보통마귀를 발로 짓밟고 있는 형상이지만 이곳의 사천왕상은 눈이 동그란 마귀가 동방지국 천왕의 발을 들어 받들고 있다. 눈동자도 그려넣은 것이 아니라 갈색유리로 만들어 붙여 특이하다. 한편 1995년 2월에 보림사 사천왕상의 몸안(무릎과 발등)에서 고려말과 조선초의 국보급 희귀본을 포함해 고서 250여 권이 발견되어 당대의 인쇄문화와 언어,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거기에는 임진왜란 이전의 언해본들이 무더기로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일주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오른 편에 최근에 지어진 종루가 있고, 정면에 동서쌍탑과 석등을 앞 세운 대적광전이 있다. 쌍탑과 석등, 대적광전 안에 있는 철조비로사나불이 모두 신라 때의 것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대적광전은 원형대로 복원 (52평)되었으며, 외호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대적광전으로 이어지는 남북중심축과 직각을 이룬 곳 동쪽에 대웅전이 있다. 현재의 대웅전은 옛주춧돌 위에 예전의 모습을 복원한 것인데, 정면5칸, 측면4칸의 팔작지붕집으로 겉 보기에는 2층이나 내부는 통층이다.그 뒤편으로 비스듬히 돌아 조금 떨어진 곳에 보조선사 체징의 부도와 비가 있다.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비와 부분 손상된 부도는 모두 보조선사 입적 후 세워졌으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 밖에 절 앞마을 뒤 잡목 숲 안에 있는 동부도와 절에서 서북쪽으로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 서부도들이 선종대 가람 보림사를 빛내주고 있는 유적들이다. 보림사마당 한가운데는 늘 일정한 수량을 유지하는 약수가 있다. 한국자연 보호협회가 한국의 명수로 지정한,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좋은 물이라고 한다.
단골이많은 숨어있는 전통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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