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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연서원 여행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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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연서원 소개

예연서원
깨끗한 전통적인 한국적인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곽재우(郭再祐)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1618년(광해군10)에 ‘충현사’로 처음 세웠고 1674년(현종15)에 규모를 확장하여 서원의 모습을 갖추었다. 1677년(숙종3) 나라에서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예연’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5)에 폐쇄된 것을 1872년(고종9)에 경의당(景義堂)을 건립하였고, 다시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소실된 것을 1977년 강당·삼문(三門)을 복원하고 1984년 사당을 복원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때 곽재우와 곽준의 신도비(神道碑)와 비각(碑閣)을 다시 세웠는데, 이 비(碑)는 국가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이 흐른다고 하여 ‘땀나는 신도비’라고도 한다. 현재는 곽재우의 재종숙으로 정유재란 때 공을 세운 곽준의 위패를 추가로 모시고 있다. 해마다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낸다. 경내에는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마다 땀을 흘린다는 비석이 있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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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연서원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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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연서원 특징

이곳은 20대, 40대 방문이 많고 방문객들은 주로 대구 달성군 유가면, 지의금부사에 관해 관심이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방문 연령 분포도

hook

예연서원 여행 관련어

대구 달성군 유가면 되었으며 지의금부사 병조판서 대구광역 기념물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의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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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연서원 근처 가볼만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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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지장사

* 사명대사의 기운이 서려있는 사찰, 남지장사 *남지장사(南地藏寺)는 경상북도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 최정산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684년(신라 신문왕 4)에 양개 스님이 창건하였다.  신라 때에는 왕이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고 유지들도 시주를 많이 하여 사세가 매우 컸다. 한때는 8개 암자를 거느렸고 수도하는 승려만도 3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명 대사 유정(惟政) 스님이 남지장사를 승병의 훈련장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왜군에게 점령되어 불에 탔다. 1653년(효종 4) 인혜(印惠)가 중건하였고, 1767년(영조 43) 모계(慕溪)와 풍흡(豊洽)이 중창하였다. 모계가 중창한 뒤 팔공산 동화사 부근의 북지장사(北地藏寺)와 대칭되는 곳에 있는 절이라고 해서 절 이름을 남지장사로 바꿨다고 한다. 그 전의 절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1940년대에 신원(信元)이 중수한 이후 꾸준히 불사를 일으켜 오늘에 이른다.  * 남지장사의 볼거리 *남지장사에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설현당·삼성각·광명루·요사 등이 있으며, 절 앞에 모계와 운계(雲溪)·경운(景雲)의 송덕비가 서 있다. 부속 암자로는 청련암(靑蓮庵)과 백련암(白蓮庵)이 있다. 이 중 청련암은 대웅전 동쪽에 있는 암자로 유정이 수행하던 곳이다. 1990년에 보수한 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되었다. 백련암은 청련암과 반대쪽에 있으며 비구니 수행처로 알려져 있다. 또, 인근에는 1789년(정조 13)에 세워진 녹동서원이 있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귀화한 김충선(金忠善) 장군을 모신 서원으로 일본인 관광객이 자주 찾는 곳이다.
깨끗한 경치가좋은 추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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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 삼가헌 고택

달성군 하빈면 묘동은 사육신 중 하나인 충정공 박팽년(1417∼1456) 후손이 모여 사는 순천 박씨 집성촌이다. 달성 삼가헌 고택은 박씨 집성촌과는 낮은 산을 경계로 하고 있다. 삼가헌은 박팽년의 11대 손인 성수聖洙가 1769년에 이곳에 초가를 짓고 자기의 호를 따라 삼가헌이라 한 것에서 시작한다. 그 뒤 그의 아들 광석光錫이 1783년 이웃 묘골에서 현재 위치로 분가한 다음 1826년 초가를 헐고 안채와 사랑채를 지었다. 별당인 하엽정(荷葉亭)은 연꽃잎의 정자라는 뜻으로 1826년 집을 지을 당시 많은 흙을 파낸 자리에 박광석의 손자 규현이 1874년에 연못으로 꾸며 연을 심고 파산서당을 앞으로 옮겨 지으면서 하엽정이라 당호를 붙였다. 삼가헌三加軒이라는 이름은 중용에서 나왔다. 중용 제 9장에는 子曰 天下國家可均也, 爵祿可辭也, 白刃可蹈也, 中庸不可能也(자왈 천하국가가균야, 작록가사야, 백도가답야, 중요불가능야) 라는 문구가 있다. 이 글은 "천하와 국가는 다스릴 수 있고, 관직과 녹봉도 사양할 수 있고, 날카로운 칼날 위를 밟을 수도 있지만 중용은 불가능하다."라는 뜻이다. 이는 천하를 다스림은 知이고, 작록을 거부하는 것은 仁이며. 칼날을 밟을 수 있다는 것은 勇에 해당한고 한다. 즉 선비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모두 갖추었다는 것이다. 하엽정은 원래 4칸 규모의 1자형 건물이었는데 앞에 누마루를 한 칸을 늘여 붙였다고 한다. 연못은 앞쪽으로 길게 뻗은 직사각형이고 가운데 원형 섬이 있고 섬까지는 외나무다리가 있어다. 이 별당은 원래 서당으로 쓰던 곳으로 앞에는 <하엽정>이라는 당호와 함께 <파산서당巴山書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안채는 전면 6칸 전퇴집으로 3평주 삼량집으로 2009년 4월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지었다. 전체적으로 볼때, 조선 중기에 건축된 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남긴 대표적인 주택이다.
깨끗한 전통적인 한국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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