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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승장비 여행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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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승장비 소개

의병승장비
전통적인 한국적인 고풍스러운

의병승장(義兵僧將)으로 금산전투에서 중봉 조헌(重峰 趙憲)과 함께 순절한 기허당 영규대사(騎虛堂 靈圭大師)의 순절사적비(殉節史蹟碑)로서 1840년(헌종 6년)에 보석사(寶石寺) 입구에 건립되었다. 비문을 지은 이는 우의정 조인영(趙寅永)이며, 금산군수 조취영이 글씨를 썼고, 비는 비각(碑閣) 안에 있다. 비의 앞면에는 큰 글자로 ‘의병승장(義兵僧將)’이 새겨져 있으나 자획(字劃)이 심하게 훼손된 상태이다. 왼쪽 면에는 창건화주(創建化主) 낙봉대인(樂峯大仁) 등 건립당시의 관계 인물의 이름을, 오른쪽 면에는 앞면의 ‘의병승장’을 창녕위 김병주(昌寧尉 金炳疇)가 썼음을 기록하고 있다. 1940년 일본 경찰이 비각을 헐고 자획을 훼손하여 땅에 묻혔던 것을 광복 후에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규모 - 비신 높이 243cm, 폭 84cm, 두께 4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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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승장비 특징

이곳은 30대, 40대 방문이 많고 방문객들은 주로 목소리테마파크, 공주 가볼만한곳에 관해 관심이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방문 연령 분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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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명선생비

임진왜란 때 금산에 주둔한 왜적을 유인하여 금성면 파초리 눈벌싸움에서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제봉 고경명 선생의 순절비이다. 전라도 출신의 의병장인 고경명의 순절비가 여기에 세워진 이유는 다음과 같다. 본래 고경명선생은 고향인 장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더욱이 임금인 선조가 파천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격분함을 참지 못한 선생은, 큰 아들 종후와 여주인 김천일, 담양부학유 유팽노 등을 찾아 상의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그 후 금산의 왜적을 향하여 적정을 수색하는 한편, 충청 의병장 조헌에게 서신을 보내서 같이 평강을 건너 금산의 왜적을 칠 것을 약속하였다.이 때 진산에 이르자, 왜병이 전주로 진군하려고 진산에 오는것을 맞아 접전 끝에 왜적을 물리쳤다. 이에 왜군은 서서히 후퇴하여 금산성으로 돌아가 수세를 취하였다. 임진년 7월 9일 새벽에 작전계획을 세우고 곽영의 군은 북문을 담당하여 공격하고 고경명 군은 서문을 담당하여 공격하였다. 북문에서 승리한 왜군이 후방에서 고경명 군을 공격하니, 앞뒤로 적을 대항해 싸우게 된 고경명군은 후방의 왜군을 쫓아 눈벌에서 왜군에 포위당하고, 전군이 순절하였다. 고경명 군의 거병 보고를 들은 선조는 공조 참의라는 관직을 하사하고 초토사라는 겸관을 전지하였으며, 순절한 소식을 듣고 애통하게 생각하여 사우를 광주에 세워 액호를 포충사라 하고 배향케한 다음 금산의 종용사에도 배향케하여 그 충의를 기억하도록 했다. 조선 17대 효종 27년에 당시 군수 여필관이 순절비를 세운 것을 일제 때 없애 버렸으나, 해방 후 후손들이 다시 세우고 1964년 비각을 건립했다.
전통적인 한국적인 고풍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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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장군 이치대첩비

이치는 순우리말 '배티재'의 한자 이름이다. 이 배티재는 대둔산 중허리를 넘어 전북 완주군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상 중요한 곳이었다. 임진년 7월 경상도와 충청도를 휩쓴 왜군이 군량미의 현지 보급을 위해 이 배티재를 넘어 호남평야로 진출하려 하였다. 이때 왜장 고바야가와가는 2만 병력을 이끌고 재를 넘으려 했다. 한편, 이보다 앞서 권율장군은 동복현감 황진과 1,500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 재를 지켜 왜군의 호남진출을 막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왜군은 수의 우세함과 승승장구의 힘을 믿고 단숨에 이 재를 넘으려고 공격했지만, 장군은 전병력을 독려, 결사전을 벌여서 적을 섬멸하여 승리를 거두니, 이를 일컬어 이치대첩이라 하고, 이후 왜군의 호남 진출 전략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1866년 금성면(錦城面) 상가리(上佳里)에 이치대첩비와 대첩사 (大捷祠)를 세웠으나 1944년 6월 일제가 항일유적 말살정책으로 폭파하여 그 파편이 진산면 사무소에 보관되었다. 1963년 대첩에 참여한 후손과 지역 유지가 지금의 장소에 비석을 건립하였다. 1991년부터 성역화계획이 수립되어 사당·비각 및 안내판 이축, 내삼문·외삼문·담장을 건립하였다. 장군의 묘소(경기기념물 제2호)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長興面) 석현리(石峴里)에 있다.
전통적인 한국적인 고풍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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