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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각사 여행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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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각사 소개

정각사
전통적인 한국적인 고풍스러운

* 바른 깨달음을 얻는 곳, 정각사 *바른 깨달음을 얻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정각사. 그 이름처럼 정각사에는 깨달음을 실천한 스님들의 부도가 사찰 입구에 서 있어서 절집을 찾아가는 나그네의 발길을 잡아끈다.  몇 천 겁의 인연으로 멈추어 서서 바라보는 부도에는 오랜 시간의 흐름이 이끼가 되어 머물러 있었다. 내 발길 끌고 내 눈길 기다린 그 분은 누구였던가? 한때는 부처님을 향해 용맹 정진하여 구도의 길을 따랐을 스님의 이름은 이제 세월의 풍상을 겪으며 마모되고 지워지고 흔적만 남아 공부 짧은 나그네가 아무리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음을 모아 보아도 정확히 읽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간신히 한 두 분의 법명을 겨우겨우 찾아내고 작은 기쁨을 가져본다. 이 정각사에는 다섯 분의 부도가 있다던데.... 또다시 주지 스님을 졸라 다른 스님들이 모셔진 부도밭에 가길 조른다. 고희를 바라보는 주지스님은 하룻밤을 정각사에 머물며 절집과 깊은 인연을 맺은 속인들의 청을 너그럽게 받아들이시곤 깡마른 체구로 축지법을 쓰듯 휘휘 앞서 걸어가는데, 해뜰녁 새벽 공기를 가르며 두 번째 부도밭을 가는 길은 큰스님들의 구도의 길마냥 인상적이다.  절집에서 나와 논두렁밭두렁을 지나 한참을 걸어 억새풀이 사람 키보다 더 큰 실개천을 건너 야트막하나 낙엽이 한 자나 쌓여 발 디딜 길을 잘못 찾아 푹푹 빠지거나 헛디뎌 가곤 했다. 그러길 10여분이 지나자 줄지어선 것같은 송림 사이로 나란히 서 있는 세 기의 부도가 한 눈에 들어 왔다. 드디어 부도밭에 다 온 것이다. 종 모양을 닮거나 팔각원당형의 부도가 아담하게 서 있는데 스님의 법명이라도 알아내려고 손을 더듬고 만져 확인한다. 이처럼 정각사는 그 역사가 다 밝혀지진 않았으나, 마을 이름이 정각리라고 할 만큼 한때는 꽤 규모 있는 사찰이어서 이곳에 인연을 지은 여러 스님들이 깨달음을 얻은 것 같다. 지금도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언덕에는 법당이 서 있고, 그 곳에서 사방을 내려보면 부처님의 큰 법이 온누리에 가득차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 정각사의 유래와 연혁 *부여에서 작은 길을 따라 논산 방향으로 가다보면 정각리에 이르고, 그 위에 있는 수골 마을에서 남쪽 태조산 방향으로 접어들면 절에 이르게 된다. 정각사는 태조산 중턱에 산 경사면을 깎아 축대로 대지를 조성한 후 건물을 조성하였다. 백제 때 창건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이를 입증할 만한 기록은 찾아지지 않는다. 조선 중엽에 편찬된『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1799년에 편찬된 『범우고』에 사찰의 위치만 전해지고 있어서 구체적 연혁이나 역사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실정이다.  나한전 뒤쪽 암벽에 삼존불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중 협시불 1구가 반가사유상으로 보이고는 있으나 조각의 마멸이 심하여 알아보기가 어려운 실정이다.사찰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의 좌측편에 있는 석종형의 부도 2기를 포함해 모두 5기의 부도가 있다고 하며, 그 중 1기를 1958년에 기단보수 공사 중 사리가 출토되어 부여박물관에서 조사한 바 있다.  「부여지」에 의하면 이 절의 동쪽에는 도솔암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한편 「부여지」에는 석성면 현내리에 부도탑이 있는 곳에 명적암(明寂庵)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인할 수 없다. 태조산 서쪽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는 정각사에는 1981년에 중건한 대웅전은 현재는 주지스님이 거처로 사용하고 있으며, 요사 두 채 가운데 하나를 1999년 11월에 완공했다. 나머지 요사 한 채는 2000년에 해체 중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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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각사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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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각사 특징

이곳은 50대, 40대 방문이 많고 방문객들은 주로 정목스님, 구리 정각사에 관해 관심이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방문 연령 분포도

hook

정각사 여행 관련어

비로자나총귀진언 도리미 망월산 석성면 미래탑 구리시청 이문안 화엄사 정목스님 정각사 정목스님 구리 정각사 부산정각사 참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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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사

* 삼천궁년의 넋을 기리는 사찰, 고란사 *낙화암 아래 백마강가 절벽에 자리하고 있는 고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절 뒤 바위 틈에 고란정(皐蘭井)이 있으며, 그 위쪽 바위틈에 고란초(皐蘭草)가 나 있다. 고란사 뒤편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약수와 고란초의 전설이 유명하며, 백마강을 바라보는 주위경관이 비길데 없이 아름답다. 일설에 의하면 이 절은 원래 백제의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 하며, 또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었다고도 전한다. 백제가 멸망할 때 낙화암(落花岩)에서 사라져간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1028년(고려 현종 19)에 지은 사찰이라고도 한다.  * 고란약수와 고란초의 전설 *백제시대에 임금님은 항상 고란사 뒤편 바위 틈에서 솟아나는 약수를 애용하여, 매일같이 사람을 보내 약수를 떠오게 하였다. 마침 고란약수터 주변에서만 자라는 기이한 풀이 있어 이름을 '고란초'라 불렀다. 약수를 떠오는 사람들이 고란초의 잎을 하나씩 물동이에 띄워 옴으로써 그것이 고란약수라는 것을 증명하였던 것이다. 백제의 임금님이 약수를 즐겨 마셔, 원기가 왕성하고 위장병은 물론 감기도 안 걸리고 사셨다 한다. 또한, 고란약수를 한 잔 마시면 3년씩 젊어진다는 전설도 있다.
경치가좋은 사진찍기좋은 즐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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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사유람선

* 유람선을 타고 낙화암의 전설을 만난다 *유람선을 타고 백제역사를 품에 안고 말없이 흐르는 백마강에는 백제시대 중요한 국사를 결정했다는 천장대, 낙화암, 조룡대, 구드래, 부산·대재각, 자온대,수북정 발길닿는 곳마다, 뱃길 가는 곳마다 백제를 만나볼 수 있다. 백마강은 낙화암, 꽃들이 떨어진 곳. 목덜미 뒤에서 나ㆍ당 연합군의 말발굽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백제가 무너지던 날 (의자왕 20년,서기 660년)백제의여인들이 적군에게 잡혀 치욕스러운 삶을 이어가기 보다는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백마강에 몸을 던졌던 곳으로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다. 훗날 그 모습을 꽃이 날리는 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백마강에서 바라보면 아직도 절벽 색깔이 붉은데, 당시 백제여인들이 흘린 피로 물들었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전해온다.낙화암의 기암절벽은 아래쪽에서 배를 타고 돌아갈 때에 더 잘 보이므로 유람선을 이용해 관람해 볼만 하다. * 백마강 주변의 다른 볼거리들 *백마강을 끼고 좌측으로 펼쳐진 10만여평의 파아란 잔디광장은 군민의 휴식 및 체육활동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고 수북정 건너로 1만여평의 노란 수채화 물감을 뿌려 놓은듯 드넓게 펼쳐진 유채단지가 조성되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으며 매년10월이면700년 백제역사를 재현하는 문화의 표현 백제문화제(올해9.28-10.2일)가 열리고 금년엔 전국유 소년축구대회(10.20-10.30)가 개최되어 황포돛배에서 바라보는 백마강 풍경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게 될 것이다. 선착장에서 내려 조금 걷다보면 구드래조각공원이 보이고 부소산과 정림사지, 백제역사문화관, 궁남지, 국립박물관등 문화 유적지가 지척에 있어 황포 돛배여행과 함께 백제고도를 둘러보기엔 더없이 좋은 코스로 부상할 전망이다. 14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백제의 흥망성쇠를 말없이 지켜본 백마강이 역사의 증인이 되어 흐르고 그위로 눈부시게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광이 잔잔한 설레임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1) 고란약수가 유명한 고란사 조룡대의 슬픈전설을 뒤로하고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낙화암 절벽 아래 백마강과 맞닿은 곳에 조용하고 단아한 사찰이 하나 보인다.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백제여인들을 추모하는 의미로 고려시대 말기에 지어진 절로 백제 시대에는 이곳에 절이 아닌 사당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절 뒤쪽바위에서 자라는 고란초에서 유래해 절이름을 고란사라고 했다. 고란사 위쪽으로는 약 50m의 깎아질듯한 절벽이 낙화암을 받치고 있는데 절벽 아래에는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낙화암(落花岩)’ 글씨가 붉게 한자로 새겨져 있다. 또 강가의 절벽이 마치 그림 병풍과 같아서 백제왕이 매번 놀고 잔치하고 노래하고 춤을 추어 지금도 대왕포라고 부를 정도로 풍경이 아름답다. 2) 따뜻한 돌의 전설이 전해지는 자온대 부산을 지나면 황포돛배 여행의 마지막 장소로서 부여에서 보령쪽으로가는 다리인 백제교 아래로 바위가 하나 있다. 열명은 앉을 정도가 되어 백제왕이 왕흥사(王興寺)에 행차하여 예불 하려면 먼저 이 바위에서 부처를 바라보며 절을 했는데, 그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 이름을 돌석이라 하며 지금은 자온대라고 명명되어 전한다. 자온대 암벽위에는 조선조 광해군때 수북 김흥국이 세운 정자인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0호 ‘수북정’이 자리해 따스한 봄 아지랑이 피는날 부소산과 나성이 보이는 전망에 그앞으로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과 함께 절경을 이루고 있다.
전통적인 한국적인 고풍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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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 백제 문화의 보고, 부소산과 부소산성 *부여에 들어서면 시가지 북쪽에 검푸른 숲을 이룬 해발 106m 의 나지막한 부소산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온다. 부여의 진산인 부소산에는 수많은 백제 여인들이 꽃잎처럼 떨어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낙화암, 백화정, 사자루, 반월루, 궁녀사, 고란사, 부소산성(사적 제5호), 해맞이하는 영일루, 성충ㆍ흥수ㆍ계백의 백제 충신을 모신 삼충사, 곡식 창고터였던 군창지, 백제 군인의 움집 수혈병영지 발길 닿는 곳마다 발걸음을 붙잡는 토성들, 백제의 역사와 백제왕실의 이야기가 곳곳에 배어 있다. 금강의 남안에 있는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이 동서로 나뉘어 붙어 있고, 다시 그 주위에 북동쪽의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식(包谷式)산성을 동반한 복합식 산성으로, 성내에는 사자루, 영일루(迎日樓), 반월루(半月樓), 고란사(皐蘭寺),낙화암(落花巖),사방의 문지(門址), 군창지(軍倉址) 등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사비성, 소부리성(所扶里城)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이 산성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 도성의 일환이며,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538년(성왕 16)수도의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나, 이 보다 먼저 500년(동성왕22)경 이미 산성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천도할 시기를 전후하여 개축되었고, 605년(무왕 6)경에 대대적인 개수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일부의 성벽은 통일신라시기에 수축되고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고을의 규모에 맞도록 축소되어 이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 백제 문화를 만난다, 부소산의 유적지 ** 삼충사 부소산성 정문인 사비문을 지나 조금 걸어올라가면 삼충사가 있다. 외삼문과 내삼문을 지나 사당에 들어서면 백제말 삼충신인 성충, 흥수,계백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해마다 10월 백제문화제때 제향을 올리고 세분의 숭고한 구국충절을 기린다.  * 영일루 영일루는 부소산성의 맨 동쪽 산봉우리에 세워져 백제왕과 귀족들이 멀리 계룡산의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며 국정을 계획하고,나라의 태평과 백성들의 평안을 기원했던 영일대에 세운 누각이다. * 군창지 일명 만리창(萬里倉)이라 불렀던 이곳은 1915년 불에 탄 쌀이 발견된 군대 곡식을 보관했던 창고이다.  * 수혈병영지 군창지를 조금 지나면 움집이 보인다. 움집은 백제 때 군인들의 움막을 발굴,복원한 것으로 1m 가량 움을 파고, 사방을 나무나 짚으로 벽을 두른 뒤 초가지붕을 얹은 모습이다. 원래 움집터와 저장고를 발굴한 곳에 전시실을 지어 구조를 자세히 살필수 있게 하였다. * 사자루 부소산 가장 높은 곳(해발 106m)에 위치한 사자루는 동쪽 영일루와 더불어 일월 음양을 뜻하며 달이 밝은 밤 누각에 오르면 아름다운 경치가 눈앞에 펼져지고 시흥이 절로 일어난다. 사자루 건립 당시 터를 파다가 광배 뒷면에 명문이 새겨진(정지원명) 금동석가여래입상(보물 제196호)이 발견되었다. 사자루 현판 글씨는 의친왕 이강의 친필이고,뒤쪽에 붙은 白馬長江은 서예가 해강 김규진의 작품이다.  * 백화정 낙화암 절벽위에 세워진 육각지붕의 정자가 백화정이다. 백마강을 시원하게 내려다 볼 수 있는 백화정은 백제멸망 당시 꽃잎처럼 떨어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숭고한 백제 여인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부풍시사(扶風詩社)라는 시모임에서 세웠다. * 궁녀사 반월루 광장에서 동북쪽 태자골로 조금 내려가면 궁녀사가 나온다. 이 궁녀사는 백제 의자왕 20년(660)에 나당 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던 날,낙화암에서 꽃잎처럼 떨어져 죽은 백제 여인들의 충절을 추모하고 그 뜻을 후세에 널리 기리고자,1965년에 세웠다. 10월 백제문화제 때 제향을 올리고 있다.  * 부여관북리백제유적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725번지에 위치한 이 유적은 현재 왕궁지로 알려져 있으며, 국립부여 문화재연구소 남쪽일대 184필지 95,048㎡(28,780평) 중 33필지 2,102㎡는 1983년 9월 충청남도 기념물 제43호 전백제왕궁지(傳百濟王宮址)로 지정되어 있다. 1982년부터 이 일대를 중심으로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5차에 걸쳐 발굴조사하여 1983년도에는 방형석축연지(方形石築蓮池)가 발견되었고, 1988년 발굴조사에서는 토기 구연부에 북사(北舍)라는 명문이 발견되었으며, 1992년 조사에서는 현재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남쪽 50m 지점에서 백제시대의 도로유적과 배수시설이 드러났다. 삼국시대의 궁궐 중 고구려의 안학궁을 제외하면 아직까지 신라와 백제의 왕궁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지만, 백제시대 마지막 도읍이었던 사비도성의 일부 유적이 밝혀진 것은 매우 중요한 학술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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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드래조각공원

* 대왕국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구드래조각공원 *부소산 서쪽 끝자락에 있는 구드래는 백마강과 어울려 빼어난 경승을 이루고 조각공원이 잘 꾸며져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찾는 휴식공간이다. 구드래 나루는 백제시대에 도성인 사비성을 출입하는 항구와도 같은 큰 나루였으며, 현재는 백마강을 오르내리는 유람선의 선착장으로 주변에는 토속음식이나 별미를 즐길 수 있는 식당들이 많이 있다. 1985년도에 국민관광단지로 조성된 구드래에는 옛 백제인의 조각 기술을 이어받은 지역 출신 유명 조각가 작품 30점과 1999년도 국제현대조각 심포지움에 참가한 국내·외 유명 조각가의 작품 29점 등 총 59점의 조각 작품으로 옛 정취와 함께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함께 갖춘 공원을 조성하여 관광객에게 상시 개방,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이 곳은 부여 사람들의 휴식처이기도 하며, "백마강과 물새가 울고, 일엽편주 돛단배를 홀로 저어가는 사공"으로 시작하여 널리 알려진 '백마강 달밤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 왜 '구드래' 라고 부를까? *백제시대 왕을 부를 때 지배족은 어라하(於羅瑕), 백성은 건길지라 하였다. 구드래는 '구ㄷ으래' 로 '구(大)'가 왕칭어인 어라하에 접두하고 두말사이에 지격촉음인 'ㄷ'이 끼어들어 '구ㄷ어라하' 가 되고 다시 줄어들어 '구ㄷ으래(구드래)'로 변천한 것으 로 볼 수 있다. 또한 '구드래'는 '大王'의 의미로 일본서기(서기 720년 편찬)에 백제를 '구다라'로 부른 대목이 많이 나타나는데 이 '구다라' 도 大王國이란 뜻으로 높여 부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인 한국적인 고풍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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