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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우포가시연꽃마을 여행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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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우포가시연꽃마을 소개

창녕 우포가시연꽃마을
전통적인 한국적인 고풍스러운

* 우포늪과 함께 할 수 있는 마을, 창녕 우포가시연꽃마을 *신당리라는 행정리의 명칭으로 불리는데 1080번 지방도의 남북에 자연마을인 쟁반과 닭개를 말한다. 쟁반은 마을이 있는 지대가 쟁반 접시처럼 생겼으므로 쟁반이라 하고, 닭개는 마을의 형태가 닭과 닮았다하여 닭개라 불린다. 신당(神堂)은 흔히 신을 모시는 당집이 있었던 마을에 보통 붙여지는 지명이다. 지금 신당리의 서편에 인가는 없지만 구신당이라 불리는 곳이 있는데 최근에 창녕 조씨의 재실 근처에 옛 신당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비석등 밑과 망조봉 골짜기 등에 안동 김씨, 달성 서씨, 밀양 박씨 등이 살았으나 일제 때 군용지로 징발됨에 따라 모두 떠나게 되어 이 근처의 마을은 폐동되고 말았다. 신당리는 행정리로는 1개리 뿐이며, 구룡초등학교가 있었는데 1999년 폐교된 것을 지역민들의 문화, 교육, 복지공간인 우포평생교육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2000년에는 사지포 아래쪽에 배수장을 설치하여 대대로 시달려 온 침수를 면하게 되었으며, 2002년에는 마을 앞 들판에도 경지정리를 하였다.   * 신당리 마을의 유래 *고려의 마지막 장수 조민수(曺敏修)는 우왕 때 왜구를 물리친 무신으로 창성부원군에 봉군된 이 고장 출신 인물이다. 이성계와 함께 요동정벌을 위해 출전하였다가 위화도회군으로 돌아와 좌시중이 되어 우시중인 이성계와 겨루며 고려왕조의 중흥을 위해 애썼으나 1389년 이성계 일파의 불만을 사서 논핵 되어 향리 창녕으로 유찬 되었다.그후 이성계가 정권을 잡게 되었으니 이곳 조씨들의 생활이 어려웠으며, 조민수를 죽이려는 시도가 여러 번 있었으며, 결국 유찬된지 1년 후인 1390년에 이곳에서 죽었으니 하룻밤 사이에 동리에 못이 생길만큼 역적으로 몰려 어려움을 겪었으리라 추측된다. 따라서 하룻밤 사이에 큰 새 못이 생겼다 함은 흔히 재산을 몰수하고 그 집터는 못을 파 버리던 저택(猪宅)이란 형벌이 여기에도 시행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조민수의 가문이라 하여 재산을 몰수하고 집터는 못을 파게 하고 이곳에서는 살 수 없어 조씨들이 구신당을 떠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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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우포가시연꽃마을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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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우포가시연꽃마을 특징

이곳은 30대, 40대 방문이 많고 방문객들은 주로 청도 가볼만한곳, 창원 수영장 펜션에 관해 관심이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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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 유물이 일본으로 넘어간 안타까움이 있는 유적, 교동고분군(경남 창녕) *화왕산 서쪽 기슭의 목마산성 아래에 있는 송현동 고분군과는 현풍으로 통하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남쪽에 위치한 대형 고분군이다. 교동에는 왕릉이라고 불리는 대고분을 중심으로 주위에 대소 수십 기의 고분들이 모여 있었으나, 현재는 8기만이 남아 있고 그나마 봉토들의 파손이 심하다. 이 고분군은 1918년에서 1919년 사이 일본인에 의해 그 일부가 발굴조사되어 유물은 대부분 일본으로 옮겨가고 지금은 일부만 국내에 남아 있다. 당시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형 고분군은 횡구식(橫口式) 또는 횡혈식(橫穴式) 고분이었다고 한다. 출토 유물은 금봉관을 비롯하여 순금이식(純金耳飾) 등 각종 귀금속으로 된 장신구와 동, 철제의 무구, 토기 등 대량의 유물이 출토 되었다고 한다. 일본인이 남긴 발굴 보고서가 간단하여 교동고분군의 구조와 출토된 유물 등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현존하는 고분 중 21기(基)는 지금까지 복원한 것인데 그중 1기는 입구 쪽을 개봉했다. 구조는 현실(玄室)과 연도는 구별이 없고 다만 장방형(長方形)이 평면횡혈식(平面橫穴式) 석실로 삼면의 측벽은 크고 작은 돌덩이이고 판석(板石)으로 천장을 덮은 것이다. 일본인에 의해 개략적인 보고서가 출판되기는 하였으나 그 많은 유물들의 출토 경위와 유구(遺構)들의 특징이 자세하게 밝혀지지 못한 것이 아쉬운 점이다.* 송현동 고분 *창녕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진한의 12개 나라 중 하나인 불사국으로, 비사벌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송현동 무덤들은 크게 2개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1지역은 목마산 기슭에서 서쪽으로 80여기의 무덤이 있던 큰 무덤들이었으나, 지금은 16기 정도만이 남아 있다.2지역은 송현동석불이 있는 부근에 20여 기 정도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대부분이 논으로 변하여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무덤은 겨우 몇 기 정도이다. 근처의 교동 무덤들과 가까이 있기 때문에 무덤의 구조와 유물의 성격이 거의 같다고 여겨진다. 교동무덤과 함께 1918년에 발굴되어 많은 양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유물 중 일부는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것도 있다고 한다.
전통적인 한국적인 고풍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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