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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사 여행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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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사 소개

청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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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사에는 드넓은 연꽃밭이 길 떠나 지친 나그네를 위로해준다. 더운 여름날, 진흙 속 연꽃밭에서는 이슬을 머금은 맑고 깨끗한 연꽃이 행여 남이 볼세라 살포시 피어나기 때문이다. 청운사의 연꽃밭은 김제시를 통틀어 제일 크고 넓기 때문에 이곳에서 한여름밤의 무더위를 식힐 연꽃축제도 펼쳐지고 있다. 여름밤의 산사는 어느새 본래의 고즈넉한 적막을 벗어버리고 젊은이들이 환호하고 그들이 내뿜는 숨결과 함께 기쁨이 충만한 축제의 한마당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연꽃 축제를 베풀어 속인들의 발길을 절집으로 향하게 하는 것은 주지스님의 공력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청운사 도원스님은 자연의 연꽃을 그림으로 표현할 줄 아는 탱화장, 즉 전라북도의 인간문화재인 것이다. 때문에 청운사에 가면 연꽃밭에서 보았던 연꽃이 스님이 펼쳐놓은 화폭 위에서, 스님의 붓꽃에 의해 한송이 꽃으로 피어나는 환희의 순간을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갖게 된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쉬지 않고 탱화를 그리는 탱화장 스님. 청운사에 가면 주지스님을 한번 뵙길 바란다. 목탁을 두드려 독경을 하는 스님이 아닌, 그림을 그리는 스님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절집에서 경험할 수 없는 독특한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 역사절은 19세기에 보천 스님이 단칸의 초가집을 짓고 주석한 것에서 시작된다. 이후 사람들이 이곳의 샘물이 좋다하여 많이 찾았다고 한다. 그 뒤의 연혁을 살펴보면 1927년에 월인(月印) 스님이 초가법당을 3칸으로 늘리고 지금의 대웅전 자리에 요사도 지었다. 1931년에는 초가법당을 허물고 그 자리에 법당을 새로 지으면서 절을 중창했는데, 이 법당이 곧 지금의 관음전이다. 1938년 벽운(碧雲)스님이 아미타불과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을 봉안했으며, 1959년에는 현재의 염불원 오른쪽에 있는 요사를 새로 지었다. 1970년에는 1927년에 지었던 요사를 헐고 그 자리에다 옛 만경현 동헌에 있던 건물을 매입해 옮겨와 대웅전을 삼았다고 한다. 1973년에는 종각과 범종을 봉안했고, 1990년 요사로도 사용되는 염불원을, 그리고 1992년에 미륵불을 봉안하면서 현재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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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사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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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사 특징

이곳은 20대, 30대 방문이 많고 방문객들은 주로 하소백련축제 (김제), 김제 연꽃에 관해 관심이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방문 연령 분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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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사

귀신사는 금산사에서 모악산 서쪽 고개를 통하여 전주로 넘어가는 길 옆에 있는 청도 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의 이 절은 대한 불교 조계종에 속해 있는데 처음 세워질 때에는 화엄종이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이 절은 의상대사(義相大師)가 문무왕(文武王) 16년(676년)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귀신사에서 이 절에 관하여 여러가지 조사를 하고 있는 박희선(朴熙善)씨는 백제 법왕(百濟 法王) 때 왕실의 내원사(內願寺)로서 처음 세워졌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써 귀신사 경내에 있는 석수(石獸)의 남근석(男根石)을 들고 있다. * 석수 석수의 몸길이는 158cm이고 높이는 62cm이다. 등에 올려진 석주는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아랫부분이 72cm, 윗부분이 40cm이며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되어 있다. 돌짐승상은 삼층 석탑이 서있는 방향과 달리 서 있다. 멀리 보이는 규봉을 바라보고 서 있는 것이다. 이곳은 모악산 봉우리들로 둘러 싸여 아늑한 느낌을 주는데 멀리 규봉이 남의집 담을 기웃거리듯 살짝 들여다보는 형상이라 이 돌짐승을 세웠다 한다. 한편 그 돌짐승상들은 '석등'을 올려놓은 짐승이였고, 석등과 석주는 그 모양이 완전히 파손되어 현재의 모양으로 남아서 그 의미가 잘못 전해지고 있다. 이 절의 이름은 국신사(國信寺), 귀신사(鬼神寺), 구순사(狗脣寺) 또는 귀신사(歸信寺) 등으로 불렸는데, 각각의 이름이 어느 시기에 그렇게 불렸는지 알 수 없다. 현재 절에는 지방유형문화재 제62호인 3층석탑을 비롯하여 지방유형문화재 제64호인 석수와 지방유형문화재 제63호인 부토(浮屠) 등의 석조물이 있으며, 건물로는 보물 제 826호인 대적광전(大寂光殿), 명부전(冥府殿) 그리고 한 채의 공양 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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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

모악산 도립공원 입구에 우뚝 서 있는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599)에 창건되고, 776년에 진표율사가 고쳐 지어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경내에는 국보 제62호로 지정된 미륵전을 비롯하여 지정문화재 10여점이 있으며, 그외에도 부속건물이 많아 호남제일의 고찰로 손꼽힌다. 목조로 된 미륵전은 우리나라에서 하나뿐인 삼층법당으로 내부는 통층으로 되어있다. 봄철이면 산 입구에서부터 금산사까지 늘어선 벚꽃나무의 장관을 보려고 각지에서 몰려오는 관광객들로 붐비며, 한 겨울에도 신도들이 미륵전의 미륵 보살상을 찾아와 절을 올리거나 탑을 빙빙 도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미륵전 미륵보살상은 옥내 입불로서는 세계 최대라 하며, 삼존불중 가운데 미륵불상이 11.82m, 좌,우불상은 8.8m이나 된다. 1999년에 개산 14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1400주년 기념관에서는 각종 문화 행사가 열린다.* 주요문화재미륵전(국보62호), 노주(보물22호), 석연대(보물23호), 혜덕왕사 진응탑비(보물24호), 금산사 오층석탑(보물25호), 금산사 방등계단(보물26호), 금산사 육각다층석탑(보물27호), 금산사 당간지주(보물28호), 심원암 북강삼층석탑(보물29호), 금산사 대장전(보물827호), 금산사 석등(보물 8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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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벽골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쌓아 만든 옛 저수지의 중수비와 둑이다.『삼국사기』에는 신라 흘해왕 21년(330)에 “처음으로 벽골제를 만들었는데, 둘레가 1천 8백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이 지역이 신라 땅이 아닌 백제의 땅이었으므로 나중에 연도를 고쳐서 신라가 만든 것처럼 보이도록 해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실제로 만들어진 때는 백제 11대 비류왕 27년(330)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후 신라 원성왕 6년(790)과 고려 현종 및 인종 21년(1143)에 고쳐 쌓은 후, 조선 태종 15년(1415)에 다시 쌓았다. 1420년(세종2년)에 큰 폭우로 유실되었다. 지금 유적에는 일직선으로 약 3㎞ 정도의 둑만이 남아있는데, 1925년 ‘동진토지개량조합’에서 이 둑을 농사짓는데 필요한 물을 대는 통로로 고쳐 이용 하면서 그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다. 둑의 북쪽에는 조선 시대에 벽골제를 다시 쌓고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 세운 비석이 있는데, 닳아서 글을 알아보기 어렵다. 1975년에는 저수지 물의 양을 조절하던 수문이 있던 자리 2곳을 발굴 조사하였는데, 그 결과 대규모의 높은 수준의 측량 기술이 이용된 공사였던 것이 밝혀졌다. 벽골제는 단순히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라는데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당시에 이미 이러한 저수지 축조가 가능할 정도의 고도로 발달된 토목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사에서도 획기적인 사실을 제공해 주는 유적이다.* 면적 - 187,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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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향교

1404년(태종 4)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635년(인조 13)에 중건하였으며, 그 뒤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무(東廡)·서무(西廡)·동재(東齋)·서재(西齋)·만화루(萬化樓)·교직사(校直舍)·내삼문(內三門) 등이 있다. 명륜당은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것을 1842년에 보수하고 1879년에 중수하였으나 6·25사변 때 다시 소실된 것을 1958년에 복구하였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고주(高柱)집으로 되어 있다. 동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며, 만화루는 2층 누각인데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것을 1635년에 복원하고 1964년에 중수한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1973년 향교 일원에 대한 보수가 있었으며, 소장 전적은 18종 25책으로 주로 경서의 낙질본이고, ≪향안 鄕案≫ 등은 보존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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