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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서어서각 여행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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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서어서각 소개

최규서어서각
깨끗한 전통적인 한국적인

조선 중기의 명신(名臣)으로 영의정을 지낸 충정공(忠正公) 최규서(崔奎瑞 1650-1735)선생에 내린 영조의 어서(御書)와 영정(影幀)을 모신 정각(旌閣)이다. 영조는 충정공의 공로를 높이 찬양하여 친필로 쓴 「일사부정(一絲扶鼎)」이란 어서(御書)를 하사(下賜)하고 충신정문(忠臣旌門)을 세우게 했다. 그러나 정각이 선 자리에 1915년 미국 대사관이 들어서게 되어 부득이 어서(御書)를 공의 묘소가 있는 지금의 이곳으로 옮겨 모신 것이다.현재 어서각(御書閣)에는 영조의 어서, 충정공(忠貞公)의 위패(位牌), 영정(影幀), 비망기(備忘記) 등을 봉안(奉安)해 놓았으며 매년 음력 10월 6일 후손들이 모여 제향을 올린다. 팔작(八作)지붕의 한식 골기와를 얹은 건물 앞 좌우에는「어서각(御書閣)」「백연사자(白蓮祠字)」란 현판(縣額)이 걸려있다. * 최규서 (1650 ∼ 1735)조선 현종(懸宗) 10년(1669) 진사, 숙종(肅宗) 6년(1680)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대사성, 대제학, 형조와 이조의 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고 경종(景宗) 3년(1723)영의정에 올라 기노소(耆老所)에 들었다. 소론의 영수(領袖)로서 활약했으며, 특히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때는 그 음모와 주동인물을 고변(告變)함으로써 난을 토평(討平)케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며, 저서로는「민재집(民齋集)」이 있다. * 규격 - 정면 494cm, 측면 370cm* 재질 - 목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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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서어서각 특징

이곳은 30대, 40대 방문이 많고 방문객들은 주로 미리내, 안성쑥고개부대찌개에 관해 관심이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방문 연령 분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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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암

국사봉 정상으로 향하면 국사암이라는 작은 절이 바위 틈새를 비집고 앉아 있다. 법당 오른쪽 옆으로 국사봉의 궁예미륵이라 불리는 세 개의 아담한 미륵이 있다. 그러나 이 미륵은 미륵이라기보다 석인상에 걸맞을 정도로 몸의 전체적인 비례에 비해 모자가 거대하고 손 모양도 수인이 아니라 선비들이 합장을 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목도 지나치게 짧으며 얼굴의 윤곽에는 불상이 주는 이미지나 친근미가 나타나 있지 않는다. 석불의 발목 이하는 땅에 매몰되어 있다. 지상에 노출된 본존의 높이는 320cm이고, 3단의 원형보개를 육계부분에 끼워 놓았다. 얼굴은 타원형으로 두 귀가 어깨까지 늘어져 있으며, 수인은 오른손을 가슴에서 손가락을 안으로 모으고, 왼손은 배에 대고 손가락을 쫙 펴고 있다. 법의는 양어깨를 덮은 통견으로, 양팔에 도식적인 주름을 도시적으로 새기고 있다. 하반신에 U자형으로 주름에 있는 것으로 봐서 군의를 가슴 부위에서 묶은 것으로 보는데, 허벅지 위에 커다란 연화문을 새겨놓았다. 우협시와 좌협시 역시 둥근 보개를 쓰고, 본존과 동일한 표현자세를 하고 있는데 크기가 약간작고, 들고 있는 지물 육화장과 합이 다를 뿐이다. 불상의 후면에는 아무런 조각을 가하지 않았다. 이 석조삼존 입상은 조각수법이나 형태를 보아 조선후기나 근대에 미륵신앙의 유행과 더불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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