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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진은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 장군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전관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오위도총부 도사로 임명된 후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훈련대장이 되어 어가를 호위하였으며,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도로 왕을 모시고 가 이듬해 평성부원군에 봉하여졌다. 인조반정 때의 공로로 정사공신 1등이 되어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인조 14년(1636년)에는 훈련원, 호위청, 포도청의 3대장을 겸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적을 막아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기 위한 여유를 주는 등 커다란 공을 세워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인조 18년(1640년) 평성부원군(坪城府院君)에 임명되었다가 인조 20년(1642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퇴하였고, 이듬해 다시 영의정으로 임명된 지 열흘만에 세상을 떠났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인조 때의 무신인 신경진 장군을 기리고 있다. 신도비는 높이 368㎝나 되는 거대한 석비(石碑)로 화강암으로 조각된 거북받침대 위에 올려져 있으며, 비(碑)몸 위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용머리 장식이 정교하고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신도비는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비문을 짓고 박태유(朴泰維)가 글씨를 썼으며 머리글인 두전(頭篆)은 이정영(李正英)이 썼으며, 비의 주인공이 밝혀지기 전에는 커다란 거북받침돌 탓에 ‘거북비’라 불리우기도 하였다. 비 건너편에는 신경진의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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