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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동 정려비각 여행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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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동 정려비각 소개

충효동 정려비각
깨끗한 전통적인 한국적인

* 충장공 김덕령 장군 일가를 기린 비, 충효동 정려비각 *충장공 김덕령(1567~1596) 장군과 그의 부인 흥양 이씨, 그 형 덕홍과 동생 덕진 일가족의 충, 효, 열을 기리기 위해 충효리 마을 앞에 세운 비각이다. 이것이 여느 문과 다른 것은 이 비각 앞의 현판에 새겨 있는 내용에서 "...1788년 정조가 윤음으로서, 표리비를 세우라" 이르고, 충효지리[忠孝之里]라는 마을 이름을 지어 하사한 점이다. 비는 1789년(정조 13년)에 세운 것으로 전면에는 비명 [朝鮮國贈左贊成忠壯公金 德齡 贈貞敬夫人 興梁李氏 忠孝之里]가 3행으로 새겨져 있다. 이 면에는 정헌대 부호조판서 서유린이 選하고 全羅道觀察使 서용보가 쓴 음기가 새겨져 있다.비의 크기는 총 높이 220Cm, 기단 높이 110Cm, 비신 높이 171Cm, 비신 너비 68cm이며 비갓이 얹혀 있다. 비각은 정면 3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이며 삼문과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비각의 건립 연대는 1792년이며, 그 뒤 수 차례의 중수를 거쳤다. 비각 전면에는 전주부윤 한용구가 쓴 정조어제윤음[正祖御製倫音]이란 현판이 있다.* 김덕령 장군 일가에 대하여 *비문에 나타난 김덕령 일가의 사적은 다음과 같다.김덕령 장군 자는 경수 본관은 光山이며 오계 성혼에게서 글을 배웠다. 임진왜란 때 형 덕홍이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자 상중임에도 의거하여 담양부사 이경린, 장성현감 이귀의 천거로 종군의 명을 받고 의병을 모아 남원에서 훈련을 마친 뒤 선전관에 임명되어 권율 휘하에서 왜의 호남진출을 막는 데 힘썼다. 1594년 진해, 고성에 나가 의병장 곽재우와 협력하여 왜병을 물리치고 1595년에는 고성에 상륙하는 적을 격퇴하였다. 1596년 도체찰사 윤근수의 노비가 상전의 권세를 믿고 군율을 어기므로 장살하여 한 때 체포되었으나, 왕명으로 석방되자 대신들과의 사이에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때마침 이몽학의 난으로 그와 내통했다는 모함을 받아 옥사했다. 후에 복권되어 1788년 의정부좌성에 추증되고 충장의 시호를 받았다.* 흥양이씨 (?~1597) : 김덕령 장군의 부인으로 정유재란 때 왜병의 추격을 받고 순절했다.* 김덕홍 (1558~15920) : 김덕령 장군의 형이며 호는 성암이다. 우계 성혼의 문인이며 임진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고경명 휘하에 참여하여 의주행재소로 가던 중 금산에서 왜병과 싸우다 전사했다.* 김덕진 (1571~1627) : 김덕령의 아우이며 자는 자룡, 호는 풍암이다. 효성이 지극했다. 두 형을 잃은 뒤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지리산 백운동에서 난을 피하여 겨우 가계를 보존했다. 난 후에 풍암정을 짓고 독서로 일생을 보냈는데 인조 때 잠시 창릉 참봉으로 나가 있다가 더 이상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1785년에 집의(執義)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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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동 정려비각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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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동 정려비각 특징

이곳은 20대, 30대 방문이 많고 방문객들은 주로 에 관해 관심이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방문 연령 분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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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동 정려비각 여행 관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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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을 찾는 사람들의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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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몽돌해변

늘 겨울 바다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 맑고 검푸른 바닷물이 커다란 바윗덩어리에 부딪혀 물보라를 일으키는 넓은 바다의 품이 그리운 사람이면 싱싱하게 살아있는 바다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바닷가하면 흔히 속초, 강릉, 동해, 삼척을 잇는 강원도 쪽만 연상하지만 울산의 주전에서 감포로 이어지는 경남북 동해안도 이에 못지않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곳이다. 특히 산과 바다를 끼고 이어지는 국도는 드라이브 코스로 으뜸이며 주변에 볼만한 곳들도 많아 겨울 관광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 울산의 바다를 끼고 있는 주전에서 출발하여 잘 포장된 해안도로를 타고 20분 정도 북쪽으로 올라가면 강동 정자포구가 나온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입심 좋은 아낙들과 매운탕거리나 횟거리를 흥정하는 사람들의 정겨운 풍경과 살아서 파닥거리는 싱싱한 해산물을 눈동냥하여 다니다 보면 사람사는 풍경도 재미있지만 이곳 특유의 멸치회 별미를 맛볼 기회를 제공하여 주기도 한다. 저녁이면 만선인 배가 포구에 들어오면 갑자기 생기가 돈다. 이른 새벽을 가르며 바다로 떠난 어선들이 귀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잔잔하던 포구가 만선기에 어울려 뭇 사람들이 모여들고, 힘차게 날아올라 어선 주위를 맴도는 갈매기의 날갯짓 사이로 햇살이 잘게 부서져 흩어진다.
전통적인 한국적인 고풍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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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충효동 요지

무등산 북쪽 충효동에 자리잡은 가마터로,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까지 삼강청자·분청사기·백자를 굽던 곳이다.가마의 구조는 사람이 드나드는 출입시설, 도자기를 집어넣는 번조실, 굴뚝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둥근 무덤 형태가 연결된 모양으로 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과 출토유물의 연도를 통해 1430년을 전후해 만들어지기 시작된 것으로 보고있다. 그 후 약 70~80년간 자기제작이 지속되다가 16세기 초에 중단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초기에는 분청사기만 만들다가 백자가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같이 제작했으나, 분청사기 무늬가 조잡해지면서 생산량이 줄어들었다. 반면 백자를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질이 좋아지고 생산량도 늘어 분청사기가마에서 백자가마로 성격이 바뀌었다. 백자는 크기가 작은 것이 주를 이루는데 비해 분청사기는 크고 작은 것이 모두 있고, 종류도 접시·종지·잔·병·항아리·제기·벼류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분청사기에 주로 사용된 무늬는 국화·나비·물고기·게·구름무늬 등이며 여러 무늬를 조합하여 그리기도 했다.광주 충효동 요지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운영되었던 곳으로, 청자부터 분청사기를 거쳐 백자로 넘어가는 과정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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