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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암 여행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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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암 소개

흥부암
깨끗한 전통적인 한국적인

* 김해를 번성하게 해주는 절, 흥부암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형국을 하고 있는 김해 임호산(林虎山) 꼭대기 가파른 자리에 위치한 가야불교의 성지 흥부암(興府庵)은 가락국의 수로왕 때 장유화상(長遊和尙)이 도성의 흥성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이다. 신비로운 땅 '가락국'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예로부터 그 형상이 거북, 용, 호랑이 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김해 사람들은 언젠가는 이곳에서 수로왕 이후 사라진 ‘훌륭한 임금이 다시 나올 것’으로 믿고 있다. 이러한 기운을 간직한 임호산은 유민산, 가조산, 호구산, 안민산, 봉명산, 임어산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데, 임호산(林虎山)은 이름 그대로 생긴 모양이 호랑이 머리와 같다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특히,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김해를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는 형상이라 사람들이 불안함을 느껴 그 입을 막아 주기 위하여 흥부암을 지었다고 한다. 곧 김해 지방이 흥하게 된다고 하여 흥부암(興府庵)이라는 절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옛 가야인들은 이곳에 도읍을 정할 때 이미 임호산의 사나운 기운을 느끼고 수로왕의 처남으로 허왕후를 따라 아유타국에서 온 장유화상이 절을 지어 가락국(김해)의 나쁜 기운을 눌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또 1820년 곽기형이 쓴 흥부암 중수기에도 이 같은 내용이 언급되어 있는데,‘김해의 오른쪽 안민산은 읍의 백호로 옛날 풍수사가 이 산에 나쁜 바위가 있어 읍에 이롭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한 까닭에 절을 세워 그 험함을 가렸다’라고 적고 있다. 흥부암이 풍수지리적으로 창건되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최근에 새로 지은 대웅전의 주춧돌도 호랑이 석상이라는 사실이다. 흥부암 자체가 호랑이 입막음인데, 거기에 더해 호랑이 모양의 주춧돌을 대웅전 기둥 아래 놓아 아예 호랑이를 꼼짝 못하게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 흥부암의 창건배경 및 역사 *옛 가야국의 중심지인 금관가야의 중앙에 위치한 흥부암은 허황후 오빠인 장유화상이 서기 48년에 창건한 사찰이라고 전하고 있다. 임호산의 풍수지리적 조건에 따라 가야국의 흥성을 빌기 위해 장유화상이 수로왕의 명을 받아 보탑을 세우고 절을 세웠다고 한다. 오랫동안 폐사가 되었다가 1700년 조선 숙종 때 새로이 중수하였는가 하면, 1760년 영조 때에도 중수를 하였다고 한다. 이어 1820년 조선 순조 때 부사 유상필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법당 등의 전각을 중건하였으며, 19세기 중반에 김해 부사 정현석이 중창을 하여 법당을 중건하였는데, 당시에는 가람이 지금의 산령각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이후 1985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89년 복원하였고, 1997년 부임한 주지 혜운스님이 부설 김해불교대학을 운영하면서 김해인의 중심적 기도처이며, 가야불교문화의 대표적 사찰로 자리 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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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암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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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암 특징

이곳은 30대, 50대 방문이 많고 방문객들은 주로 임호산, 봉황역에 관해 관심이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방문 연령 분포도

hook

흥부암 여행 관련어

임호산 봉황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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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거리

* 금관가야의 발상지를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가야의 거리 * 김해시는 금관가야의 발상지로서 시가지 전역에 산재한 역사문화자원을 종합적으로 정비하고자 가야문화의 주요 유적지들을 연결하는 가로공원의 성격으로 가야의 거리를 조성하였다. 총연장 2.1km내에 찬란했던 가야 해상무역의 영화를 간직한 해반천과 더불어 주변에 산재한 봉황동 유적, 수로왕릉, 대성동고분군, 국립김해박물관을 아우르는 도시의 골격적 경관축으로서 도시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생활 속에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였다. 철기문화를 상징하는 상징분수와 야간 경관조명 등으로 가야문화의 번영을 상징화하였으며, 타원형의 바닥분수, 가야인의 생활환경이 함축된 주제정원, 소광장, 쉼터들이 조성되어 있다. * 금관가야가 있던 역사의 고장, 가야 * 김해는 옛 금관가야가 있던 역사의 고장이다. 가야는 우리나라 고대문화의 커다란 줄기 가운데 하나였는데도 관심 밖에 머물다가 최근에 이목을 집중적으로 받고 있다. 가야는 520년 동 안 한반도에 존재했었다. 가야는 크게 전기 가야연맹과 후기 가야연맹으로 구분된다. 전기 가야 연맹시기는 김해의 금관가야가 중심이었고 후기 가야연맹 시기는 고령의 대가야가 맹주 자리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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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구지봉

* 김수로왕 탄생설화의 중심지, 구지봉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龜山洞)에 있는 작은 산봉우리로 1983년 8월 6일 경상남도기념물 제58호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 3월 7일 사적 제429호로 변경되었다. 가야의 시조 수로왕(首露王)이 탄강(誕降)하였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원래는 거북 머리 모양을 닮았다 하여 구수봉(龜首峰)이라 하였는데, 지금 수로왕비릉(首露王妃陵:사적 74)이 있는 평탄한 위치가 거북의 몸체이고, 서쪽으로 쭉 내민 봉우리의 형상이 거북의 머리 모양 같다고 하여 이같은 이름이 붙었다.정상부에는 기원전 4세기경의 것으로 보이는 남방식 고인돌이 있다. 고인돌은 5∼6개의 짧은 받침돌 위에 지름 2.5m 정도 되는 덮개돌이 덮여 있고 그 위에 한호(韓濩)가 쓴 것이라 전해지는‘구지봉석(龜旨峰石)’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가야 건국신화와 관련하여 한국 고대국가의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다.   * 김해김씨의 시조, 김수로왕 탄생 설화 *『삼국 유사』 「가락국기」 부분에 기록되어 있는 김수로왕의 탄생 설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서기 42년인 신라 유리왕 19년 3월의 어느 날, 이 곳 마을 사람들은 북쪽 구지봉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 곳에 가보니, 사람은 보이지 않고, 산꼭대기 흙을 뿌리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 곧 대왕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소리만 들렸다. 마을 사람들이 그 말에 모두 기뻐하며 노래하고 춤을 추자,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땅에 떨어졌고, 거기에는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합 (金盒)이 있었다. 그 뚜껑을 열자 황금빛 알이 6개가 있었는데, 후에 거기에서 아기가 나와 6가야국의 왕이 되었으며, 그 중 가장 처음 태어난 아기가 김수로 왕이다. 이처럼 구지봉은 비록 야트막한 구릉지에 불과하지만, 가야의 시조 탄생 설화의 주무대로서 오늘날까지도 이 지역 사람들에게 신성한 산으로 여겨지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구지봉을 관통하는 도로공사로 거북의 목부분이 끊겼는데,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 하여 도로 위에 인도를 놓아 끊어진 목 부분을 연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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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봉황동 유적

* 철기시대의 가야문화, 봉황동 유적 *가야시대의 대표적인 조개무지로서 1920년 우리나라 고고학상 최초로 발굴조사된 회현리 패총과 금관가야 최대의 생활 유적지인 봉황대(구 문화재자료 제87호)가 합쳐져 2001년 2월 5일 사적으로 확대 지정된 유적이다. 또한 구릉 위에는 황세장군과 여의낭자 전설에 관령된 여의각, 황세바위 등이 남아있으며, 가야시대 고상가옥, 주거지 등이 발굴되기도 하였다.철기시대 초기의 것으로, 높이가 7m, 동서의 길이 약 130m, 남북의 너비 약 30m의 낮은 언덕 위에 이루어져 있다. 구릉의 남쪽에는 회현동의 마을이 인접해 있고, 북동쪽 낭떠러지 밑에도 민가가 들어서 있어 패각층이 드러난 단면과 구릉 위에 흩어진 흰 조개껍데기를 볼 수 있다. 처음 알려진 것은 1907년이지만, 1920년에 있었던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비롯하여 그 뒤 몇 차례의 학술조사를 통하여 이 유적에 대한 문화적 성격과 연대의 개요가 밝혀져서, 한국 선사시대의 유적지 중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적지이다. 일련의 발굴을 통하여, 이른바 김해토기(金海土器)라고 명명(命名)된 토기의 조각들이 가장 많고, 도끼와 손칼과 같은 철기가 발견되었다. 따라서 철기가 이미 일상생활의 도구로서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고, 철기 이외에 골각제품(骨角製品)으로서도 골촉(骨鏃) ·골침(骨針) 등과 송곳 같은 찌르개류[尖頭類]가 함께 출토되었다. 김해토기는 종래의 민무늬토기보다 높은 온도로 구워서 만든 발달된 경질(硬質)의 토기로서, 그 특색은 문살무늬나 삿무늬 등의 타형(打形)무늬가 있다는 점이다. 타형무늬는 토기를 단단히 하기 위하여 무늬가 새겨진 방망이로 두드려서 생긴 것이다. 특히 후일에 와서 신라토기(新羅土器)의 모체가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원시신라토기라고도 한다.   * 봉황동 유적의 가치 *1920년의 발굴 때 왕망(王莽)의 신(新)나라 때의 돈인 화천(貨泉) 1개가 나와 이 패총의 상한연대(上限年代)가 밝혀졌고, 또 함께 발견된 탄화미(炭化米)는 한국의 벼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 뒤 34 ·35년의 발굴을 통하여 한 무리의 돌널무덤과 그 옆의 독무덤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한 개의 옹관에서 세형동검(細形銅劍)과 청동제품 등이 출토되었다. 이 외에도 남방식 고인돌[南方式支石墓]의 뚜껑돌로 보이는 한 개의 큰 돌이 현재에도 있다. 이 유적들 사이의 층위적 관계(層位的關係)는 아직도 연구할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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