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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길산역 여행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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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길산역 소개

전통적인 한국적인 고풍스러운
지하철역/전철

운길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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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길산역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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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길산역 특징

이곳은 20대, 40대 방문이 많고 방문객들은 주로 남양주시청, 고당에 관해 관심이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방문 연령 분포도

hook

운길산역 여행 관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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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광릉

* 세조와 세조비의 무덤, 광릉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선 제7대 세조와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의 능으로 사적 제197호이다. 조선 왕릉 최초로 왕과 왕비의 능을 서로 다른 언덕 위에 따로 만든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식을 취하였고, 두 능의 중간지역에 하나의 정자각(丁字閣)을 세웠다. 세조의 유언에 따라 봉분 내부에 돌방을 만들지 않고 회격(灰隔; 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으로 처리하였다. 무덤 둘레에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이전에 병풍석에 새겼던 12지신상은 난간석에 새겼다. 또, 능역 아래쪽에는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길인 참도(參道)가 생략되어 있다. 이렇게 간소하게 능을 조성함으로써 부역인원과 조성비용을 감축하였는데 이는 조선 초기 능제(陵制)에 변혁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고, 이런 상설제도는 이후의 왕릉 조성에 모범이 되었다. 능 주위에는 문인석·무인석·상석·망주석·석호(石虎)·석양(石羊)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 광릉은 크낙새 서식지 *광릉 주위는 30여만 평의 넓은 숲으로 100살 넘은 노목들이 울창하여 새들의 낙원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천연기념물 제11호인 크낙새 서식지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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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사릉

* 정순왕후의 무덤, 사릉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선 왕조 시대 때 가장 비운의 여인으로 꼽히는 단종(端宗)의 비(妃)인 정순(定順) 왕후(1440∼1521년)는 1453년 왕비로 간택되었으며 2년 뒤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의덕(懿德) 왕대비에 봉해졌다. 하지만 1457년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있는 유배지로 보내지고 정순 왕후도 부인으로 강봉된다. 그 해 단종은 사사되면서 정순 왕후는 궁궐에서 추방당해 동대문 밖 숭인동 동망봉(東望峰) 기슭에 들어가 살았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에 왕후는 늘 통곡하였으며, 이로 인해 동정곡(同情哭)과 동망봉 이외에도 많은 유래가 생겼다.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정순왕후는 힘든 생활 속에서도 세조가 내린 집과 식량을 끝내 받지 않았다. 평생을 청빈(淸貧)하게 살다간 정순 왕후는 죽어서도 여인네들의 한을 달래는 토속신으로 숭앙되었다. 왕후가 자식이 없었으므로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가 무덤을 만들었고, 숙종 24년(1698)에 단종이 왕으로 복위 되면서 정순왕후라 봉해졌고 왕후의 무덤을 사릉이라 했다. 하지만 살아 생전 생이별을 해야 했던 두 분은 죽어서도 같이 있지 못하고 떨어져 있어, 한 곳으로 모으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 사능의 형태 *사릉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설치되지 않았으며, 봉분 앞에 상석 1좌, 상석 양측에 망주석 1쌍을 세웠다. 봉분 주위에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1쌍이 배치되어 있고, 그 바깥쪽으로 3면의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이 둘러져 있다. 그 아랫단에는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 그리고 장명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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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홍릉과 유릉

* 조선왕조 마지막 두 황제를 모신 곳, 홍릉.유릉(홍유릉)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조 마지막 두 황제와 그 비를 모신 이곳은 사적 제 207호로 지정되어 있다. 홍릉은 조선왕조 26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민씨의 능이고, 유릉은 27대 순종황제와 원비 순명황후 민씨 및 계비 순정황후 윤씨를 모신 능이다.  원래 홍릉은 명성황후 민씨의 능으로서 서울 청량리에 있었으나 고종의 승하로 국장할 때 이곳에 옮기어 함께 모셨다. 유릉은 원래 순명황후 민씨의 능으로 양주 용마산에 있었으나 순종 인산 때 이곳에 이장하였고, 1966년 순정황후 윤씨를 또한 이곳에 함께 모셨다. 홍릉과 유릉은 종래의 왕릉과 형식이 다르며 모두 광무 이후 황제라 칭하던 왕이었던 만큼 명태조의 효릉을 본따서 조영하였다. 종래의 정자각 대신 정면 5칸, 측면 4칸의 침전을 세웠고 그 앞쪽으로 문무석을 세우고, 홍살문까지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말의 순으로 석수를 세워 놓고 있다. 홍릉 석물이 전통적인 수법으로 만들어진데 대하여 유릉 석물은 사실적이고 개성적이며 입체감을 잘 살리고 있다.  청량리에서 경춘가도를 가다 도농동 삼거리 검문소에서 춘천쪽으로 약4km 지점 오른편에 울 창한 소나무 숲속에 위치하고 있다.   * 홍릉과 유릉이라는 명칭에 대하여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은 왕·공족의 분영은 묘로 한다는 정책을 펼쳤다. 왕의 무덤인 능陵도 세자의 무덤인 원園도 아닌 일반인의 무덤인 묘墓로 격하시키겠다는 뜻이었다. 왕공가궤범을 따르자면 고종과 순종의 무덤은 왕릉이 될 수 없었는데, 이때 왕실에서 생각해낸 것이 고종의 비 명성황후의 홍릉과 순종의 비 순명효황후의 유릉이었다. 고종의 장례 때는 명성황후의 재궁을 원 홍릉(청량리)에서 현 홍릉(남양주시)으로 옮겨와 합장하였고, 순종의 장례 때에도 구 유릉(서울 능동 어린이대공원)에서 순명효황후의 재궁을 모셔와 합봉(남양주시)하였다. 새로운 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능의 칭호를 가져다 쓰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제로서는 이것을 막을 법적인 근거가 없었으며, 능의 이장 문제 또한 이왕직이나 총독부가 관여할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왕실 내의 문제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 문제는 별 탈 없이 처리되었다. 그러나 본래 왕릉 장법에서는 왕비의 능에 왕을 합장할 경우엔 새로운 능호를 쓰게 되어 있다. 중종이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 옆에 같이(이때의 경우 한 구역 안 두개의 능침이라 하여 동원 이강이라 한다. 봉분은 따로 떨어져 두개이지만 제사는 한 정자각에서 받는다)안장되었을 때 희릉의 능호를 같이 쓸 수 없다 해서 정릉으로 능호를 새로 올렸던 전례가 있고, 숙종은 인현왕후의 능에 묻을 것을 미리 지시했기 때문에 인현왕후의 능호인 명릉을 그대로 사용하였다(이 경우는 봉분이 붙어있어서 쌍릉이라고 한다). 원래 왕릉 장법에 따르면 새로운 능호를 써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고종과 순종의 경우는 일제의 간섭으로 인하여 그렇지 못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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