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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문 이선제부조묘 여행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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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문 이선제부조묘 소개

필문 이선제부조묘
전통적인 한국적인 고풍스러운

* 필문 이선제를 모시는 사당, 필문 이선제부조묘 *부조묘란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를 사당에 모시고 영구히 제사지내도록 하던 사당으로 조선 초의 문신인 필문 이선제(1389∼1454년)의 신위(神位)를 모신 사당이다. 원래 포충사 뒤쪽 산기슭에 있으나 원래의 위치에서 50여m 왼쪽으로 옮겨온 것이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앞마루를 둔 맞배집이다. 앞마루는 반폭칸으로 개방하였으며, 툇마루를 놓았다. 공포( 包)는 쇠서 하나를 내어 가운데에 연꽃무늬를 둔 초익공(初翼工)으로 위부분에 용머리 장식을 하였고 마루의 대들보 쪽에는 구름무늬로 처리하였다. 가구(架構)는 고주(高柱) 5량형(梁形)으로 되어 있으며, 도리(道理)는 장혀(長舌)를 받친 국도리를 걸쳤다. 그리고 마루 기둥의 주심도리(柱心道理) 외기둥 위는 납도리를 사용하였고, 두심도리 장혀와 창방 사이에는 소로(小累)를 둔 원반(原盤)을 하나씩 놓았다.  막돌초석 위에 정면만 민흘림 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을 세웠다. 마루 밑은 호박돌 위에 동바리 기둥으로 처리하여 바람이 잘 통하도록 밑벽막이 없이 개방하였다. 문은 쌍여닫이문으로 띠살문이며, 겹처마이다. 고설삼문(高設三門)과 양측의 맞담 위에 기와를 얹어 담을 돌렸으며, 뒤쪽은 언덕으로 둘러 싸여 있다. 부조묘의 뒷산 언덕에 필문의 묘(墓)와 묘비(墓碑)가 있으며, 이곳에서 500여m 떨어진 도로변에 그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마을 앞에는 필문이 심은 괘고정(掛鼓亭)이라 불리는 수령(樹齡) 600여년의 노거수(老巨樹)가 있어 유서 깊은 이곳의 유래를 상상하게 한다.  * 고려사 편찬에 참여한 필문 이선제 *필문 이선제는 1419년(세종 1) 문과에 급제한 후 세자빈객(世子賓客),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등을 역임하였고, 문종 때는 정인지(鄭麟趾) 등과 《고려사(高麗史)》 편찬에 참여하였다.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에 돌아와서는 후진 양성은 물론 이 고장에 향약(鄕約)을 베풀어 미풍양속(美風良俗)을 이루는데 모범이 되었다. 이 곳 이외에도 강진의 수암서원 오현당(秀巖書院 五賢堂)과 죽산사(竹山祠)에 배향되었다.  [문화재 정보]지정번호 : 광주민속자료 제7호  지정연도 : 1990년 10월 15일  소장 : 사유  시대 : 조선시대  분류 : 민속자료 규모 :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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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문 이선제부조묘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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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문 이선제부조묘 특징

이곳은 20대, 30대 방문이 많고 방문객들은 주로 진월동 전라도이야기, 미쓰램주월점에 관해 관심이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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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원희가옥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옛 집터를 그 후손들이 여러차례 고쳐지은 집이다. 이 집은후손들이 여러 차례 고쳐 지은 집으로 현존 가옥은 1917년 건축한 것이다. 예전에는 더 많은 건물이 있었는데 현재는 사랑채, 안채, 곳간채, 사당, 대문등이 남아있다. 대문은 정면 세칸 측면 한칸이다. 사랑채는 정면 네칸 측면 한칸으로 앞뒤로 마루가 있는 팔작 기와집이다. 다듬돌 바른층 쌓기의 두벌대 기단위에 덤병주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우미량과 굴도리, 장혀를 보아지와 함께 결합하였다. 평면은 좌로부터 한칸의 방 3개와 한칸의 대청을 1단 높혀 누(樓)마루로 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여섯칸, 측면 한칸에 전후좌우에 마루가 있는 팔작 기와집이다. 다듬돌 바른층 쌓기의 외벌대 기단위에 덤벙 주초석을 놓고 앞열은 원형 그 외는 사각기둥을 세웠다. 원형 기둥위에는 우미량과 굴도리, 장혀를 보아지와 함께 결합하였다. 내부가구는 고주위에 대량을 걸치고 판대공을 놓았으며 구 위에 종도리를 놓았다. 평면은 좌로부터 한칸반의 부엌, 두칸의 대청, 한칸의 방으로 되어 있다. 창호는 전체가 양쪽으로 열어지는 문이며, 방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넉살창이 있다. 숭정기원후오갑정사윤이월초구일(崇禎紀元後五甲丁巳閏二月初九日)이라는 상량문에 글씨가 쓰여 있는데 이것으로 건립연대가 1917년임을 알수 있다. 사당은 고경명장군과 그 아들 종후, 인후 형제의 부조묘이다. 이 사당은 정면 세칸 측면 한칸으로 앞에만 마루가 있으며 맞배지붕이다. 외별대의 낮은 기단위에 덤벙 주초석을 놓고 현형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첨자형의 포로 결합하였고, 초익공 위에는 용두를 빼내고 장혀와 굴도리를 얹었다. 내부가구는 대량위에 동자주를 얹고 종보를 걸친 뒤 그 위에 다시 판대공을 놓았으며, 겹처마에 조잡한 모조 단청을 하고 있다. 건립연대는 안채보다 빠른 시기로 추측된다.
전통적인 한국적인 고풍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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