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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말이산 고분군 여행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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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말이산 고분군 소개

함안 말이산 고분군
시끌벅적한 즐거운 맑은

* 아라가야 문화를 알 수 있는 유적, 함안 말이산 고분군 *함안군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분지로 북과 서는 낙동강과 남강으로 남과 동은 600m가 넘는 산으로 둘러 있다. 이 고분군은 아라가야의 도읍지였던 가야읍 도항 · 말산리 일원에 위치하며 찬란한 가야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적이다. 아라가야 왕들의 무덤으로 생각되는 100여기의 대형고분들은 높은 곳에 열을 지어 위치하고, 그 아래로 1,000여기나 되는 중소형의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다. 이 고분군은 일제강점기에 처음 조사되었는데, 당시 제34호분은 봉토(封土)의 지름이 39.3m, 높이가 9.7m나 되는 최대 규모의 왕릉이었다. 최근에는 고분군 북쪽끝 자락에 있는 마갑총에서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그려진 것과 같은 말갑옷이 출토되었고, 다섯 사람의 순장 인골(人骨)이 확인된 제8호분의 조사로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다.* 함안 말이산 고분군의 역사적 사실과 의의 *현재까지의 발굴조사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다음과 같다.첫째, 공자모양의 굽다리접시(工字形 高杯)불꽃모양의 창을 낸 굽다리접시(火焰型透窓高杯)는 아라가야가 여러 가야 중에서도 독특한 문화를 가진 독자적인 정치세력 이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둘째, 각종의 큰칼 · 갑옷 · 말갑옷 · 새가 달린 비늘쇠(有刺利器)같은 철제품과 금·은 ·유리· 옥으로 만든 장신구들은 아라가야 왕의 강력한 위상을 보여 주었다.셋째, 기원전후부터 6세기 중반까지 만들어진 이 고분군은 아라가야의 성립 · 발전 · 멸망의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다.넷째, 이 고분군의 출토품과 같은 유물은 동래 · 경주 · 일본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아라 가야의 산물이 다른 가야와 신라, 일본열도의 왜까지 수출되었음을 보여준다. 다섯째, 고분군의 규모와 화려한 유물들은 6세기경의 아라가야가 남부가야의 중심으로 주변국들과 교섭하던 모습을 그려볼 수 있게 해주었다. 현재는 이 고분군이 위치한 곳을 끝 말자의 말산(末山)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말산은 말이산으로 불렸었다. 말이산(末伊山) 마리산은 머리산이었다. 원래는 아라가야의 시조가 등장하고, 역대 왕들이 묻혔던 우두머리의 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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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말이산 고분군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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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말이산 고분군 특징

이곳은 20대, 30대 방문이 많고 방문객들은 주로 대성동 고분군에 관해 관심이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방문 연령 분포도

hook

함안 말이산 고분군 여행 관련어

대성동 고분군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의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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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동유적지

* 고려의 충절을 지킨 이오 선생의 고려인 마을, 고려동유적지 *고려동유적지는 고려 후기 성균관 진사 이오(李午)선생이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이곳에 거처를 정한 이후 대대로 그 후손들이 살아온 곳이다. 이오 선생은 이곳에 담장을 쌓고 고려 유민의 거주지임을 뜻하는 '고려동학' 이라는 비석을 세워 논과 밭을 일구어 자급자족을 하였다. 이오는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았다. 또 아들에게도 새 왕조에 벼슬하지 말 것이며, 자기가 죽은 뒤라도 자신의 위패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도록 유언하였다. 자손들은 19대 600여 년 동안 이곳에서 선조의 유산을 소중히 가꾸면서 살았다. 뿐만 아니라 벼슬보다는 자녀의 훈육에 전념하여 학덕과 절의로 이름 있는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이에 고려동(高麗洞)이라는 이름으로 오늘까지 이어 오고 있다.   * 고려동 유적지의 볼거리 *현재 마을 안에는 고려동학비, 고려동담장, 고려종택, 고려전답, 자미단(紫薇壇), 고려전답 99,000㎡, 자미정(紫薇亭), 율간정(栗澗亭), 복정(鰒亭) 등이 있다. 후손들이 선조의 유산을 소중히 가꾸면서 벼슬길에 나아가기보다는 자녀의 교육에 전념함으로써 학덕과 절의로 이름있는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이곳을 1983년 8월 2일 기념물 제56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문화재 정보]지정종목 : 시도기념물  지정번호 : 경남기념물 제56호  지정연도 : 1983년 8월 2일  소장 : 이홍섭  시대 : 조선  종류 : 유적지  크기 : 면적 8,842㎡  
안전한 전통적인 한국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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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정

* 조선시대 풍류를 즐기던 곳, 무진정 *무진정은 풍류를 즐기기 위해 언덕 위에 지어진 정자이다. 이 정자는 조선 명종 22년(1567)에 무진(無盡) 조삼(趙參)선생의 덕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세우고, 선생의 호를 따서 무진정(無盡亭)이라고 하였다. 무진은 조선 성종 14년(1483)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 2년(1507) 문과에 급제하여 함양·창원·대구·성주·상주의 목사를 지냈고,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 겸 춘추관(春秋館) 편수관(編修官)을 지냈다.   * 무진정의 형태와 구조 *앞면 3칸·옆면 2칸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앞면의 가운데 칸에는 온돌방이 아닌 마루방으로 꾸며져 있고, 정자 바닥은 모두 바닥에서 띄워 올린 누마루 형식이다. 기둥 위에 아무런 장식이나 조각물이 없어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건물로 조선 전기의 정자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29년 4월에 중건한 것으로 기둥 위에 아무런 장식이나 조각물이 없이 단순 소박하게 꾸민 팔작지붕의 건물로 조선 초기의 정자형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앞뒤의 퇴를 길게 빼고 중앙의 한 칸을 온돌방으로 꾸며놓았다.   [문화재 정보]지정종목 : 시도유형문화재  지정번호 : 경남유형문화재 제158호  지정연도 : 1976년 12월 20일  시대 : 조선시대종류 : 누(정)각  
안전한 전통적인 한국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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